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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May 08. 2018

손없는 색시- 변화, 희망의 시작

나에겐 이 공연이 일종의 붉은 점이었다.



 


어디서 부터 글을 시작해야할까. 그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던 일요일이었다. 약속이 빡빡하게 잡혀있어서 일어나 뭉그적거리며 나갈 채비를 시작했다. 딱히 신나거나 즐겁다기 보다는, 약속이 있기에 억지로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일으켰다. 딱히 즐겁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하루의 시작. 사실 그 주 내내 무기력한 나날들이 계속되어서 그 권태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것 같다. 햇빛도 따뜻하고 바람도 기분좋게 살랑거렸지만 그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법같은 날씨 정도론 침대에서 한 달 동안 뒹굴 거리고 싶은 마음을 누르기엔 부족했다.


나를 일으킨 건 '약속'이라는 의무였다. 겨울잠 자기는 일등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남산 예술센터로 향했다. 저녁 약속 전에 이전에 신청했던 '손없는 색시' 연극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연휴에 집에 내려가게 되어서 빠듯한 일정에도 일부러 끼워넣은 일정인데, 이 연극은 뭐랄까 참 묘했다. 사람을 기분 좋게, 두근거리게 만드는 그런 연극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만나서 두근 두근 설렐 때, 그 느낌을 아주 오랜만에 가져다 준 연극이었다.

 



 

이 연극의 주요 서사는 꽤 간단하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슬픔과 절망에 빠져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 색시, 그런 색시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지는 일에 질려 자의식을 가지고 그녀를 떠난 색시의 손, 고통의 절정에서 색시를 찾아온 다 늙어서 태어난 아들, 아들의 새옷을 짓기 위해 떠나는 색시와 아들의 손을 찾는 여정. 극을 구성하는 큰 요점은 이 정도이다.


이 여정에서 색시와 아들은 살구나무 주인, 할멈, 땅과 같이 여러 인물을 만나는데 그 만남의 과정과 나아감의 과정이 꽤나 유쾌하게,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다이나믹하게 다가온다. 인형극이라는 독특한 표현방식이 이 연극을 재기발랄하면서도 입체감있게 만들어 주었는데, 배우와 인형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각 배우의 내래이션이 합쳐져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방식은 마치 늦은 밤 할머니 앞에 모여 이야기를 듣듯 생생한 현장감을 주었다.

 

 

 

 

나는 극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한국적인 익살'이란 단어를 머릿 속에서 내내 떨칠 수가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남편을 잃고 생활에 필수적인 손도 떠나버리고 남은 건 절망 밖에 없는 색시에게 갑자기 떡하니 아들이 태어났다. 그것도 다 늙어빠진 할아버지가 되어서. 사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내가 색시라면 딱 죽고 싶은 상황일테다. 하지만 극은 심각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다 늙어서 태어난 아들, 붉은 점은 극을 재치있게 끌어가는 주요 인물이다.


붉은 점은 때로는 아이처럼 철없이, 때로는 다 늙은 노인네처럼 철없이 행동하며 웃음을 유도한다. 그냥 철없는 늙은 애다. 젖을 달라고 떼를 쓰고, 새 옷을 지어 달라 떼를 쓰고, 어머니를 매일 울게 해 자신을 늙게 만든 아빠가 싫고, 총알 8발을 맞아 전사한 아빠의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그 당돌함과 뻔뻔함을 보고있자니 어느새 색시의 입가에도, 관객의 입가에도 어느샌가 어이없다는 실소가 걸린다. 절망의 색채로 뒤덮여있던 무대가 어느새 웃음소리가 가득찬다.

 

 



'붉은 점'은 한국적인 익살을 제대로 표현한 인물이다. 전쟁, 죽음, 절망, 슬픔. 이 무거운 주제를 뒤로하고, 이 아이는 밝고 기운찬 에너지를 내뿜는다. 정작 이 아이가 떠안은 '늙음'이라는 짐이 앞선 무거운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비롯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붉은 점은 그 '늙음'을 통해 관객에게 웃음을 전달한다. 다 늙은 아이이기에 오히려 능청스럽게 어른과 아이의 경계를 오가며 극의 균형을 맞춘다.


붉은 점의 등장으로 반전되는 것은 극의 분위기만이 아니다. 이 늙은 아이가 이끌어오는 가장 큰 반전은 색시의 태도 변화이다. 남편을 잃고 슬픔에 몸부림치던 색시는 손으로 아픈 가슴을 두드리며 슬픔을 참아낸다. 슬픔을 토해내지 못하고 참고 살아가는 색시의 태도는 상당히 관조적이다. 마치 시체처럼 그저 생을 유지하는 색시에게 질려 그녀의 손은 그녀를 떠난다. 애초부터 손은 사람에게 꼭 필요한 부위이다. 삶을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자, 능동적인 행위의 첫 머리에 위치하는 부위이다.


어떤 움직임이 시작될 때 손은 그 시작에 위치한다. 손은 결국 능동성을, 주체성을, 그리고 생의 의지를 표방한다. 그런 손이 색시를 떠나는 설정은 그녀에게서 생의 의지가 떠나감을 의미한다. 이런 서사에 따라 그녀는 목을 매게 되는데 이때 불가피한 변화가 그녀를 덮친다. 늙은 아들 붉은 점이 태어난 것이다.


                                                       



붉은 점의 출산은 색시에게 예상하지 못한 불가피한 변화이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이다. 다 늙어서 태어난 아들은 그녀에겐 너무 어려운 자식이다. 노인네처럼 능구렁이에, 아이의 철없음과 떼쓰기를 필살기로 장착했다. 떠올리기만 해도 슬픈 남편의 8발 총상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며 남편의 유품인 8개 구멍의 피리를 불며 노닌다. 당황스러움이 그녀를 덮치지만 어쩐지 이 상황이 어이가 없고 웃기다. 내내 슬픔과 절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던 그녀에게서 웃음이 보인다. 갑작스레 닥친 변화가 그녀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사실 손을 찾는 그 여정이 시작되기 전부터 자신을 찾아온 아들로 인해, 그 변화로 인해 그녀의 상처는 치유되기 시작했다. 변화, 희망의 시작이다.





늙은 아들, 붉은 점은 색시에게 찾아온 변화이다. 이 아이로 인해 색시는 살아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변화는 색시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손을 찾아 떠나는 붉은 점과 색시의 여정은 사실 전쟁으로 인해 그들과 같은 상처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고 아픔을 나누는 과정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논밭에 한숨짓던 살구나무 주인, 전쟁으로 잃은 아들의 시체를 찾아다니는 할멈, 전쟁 통에 박힌 총알로 아파하는 땅. 이들은 모두 전쟁이란 무기에 상처입은 피해자들이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색시와 그 슬픔으로 늙음을 입은 붉은 점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신기하게도 이들은 서로간의 교류를 통해 각자의 상처를 보듬는다. 붉은 점의 오줌으로 풍족한 농작물을 얻은 살구나무 주인은 색시에게 자신의 바지를 주어 남복을 돕고, 색시에게 남편의 시신을 보내준 할멈에게 남장을 한 색시는 하룻밤 아들 노릇을 해주고, 자신의 가슴에 박힌 총알을 빼준 모자에게 땅은 새로운 길을 만들어 우물로 안내한다. 이렇게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과정에서 그들의 상처는 치유의 길로 들어선다. 상처의 공유와 피해자들의 연대에 대한 중요성을 연극은 은은하게 드러낸다.


                    


 

색시에게 찾아온 붉은 점이 치유의 시작이고, 손을 찾으러 다니는 여정이 치유의 과정이라면, 마지막은 상처의 극복이다. 우물에 당도한 모자는 색시의 손을 찾기 시작한다. 과거처럼 색시의 손이 다시 그녀에게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아들 붉은 점은 우물에 빠지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색시는 자신의 손을 애타게 부른다. 색시를 떠났던 손은 거친 세상에 질려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오려고 시도하나, 이상하게 손과 색시의 손목은 붙지를 않는다. 아들 붉은 점은 점점 우물 속으로 가라앉고 색시의 손은 자신과 똑 닮은 붉은 점을 가진 색시의 아들을 한번이라도 안아보고자 우물 속으로 아들 붉은 점을 구하러 내려간다. 그리고 마침내 아들 붉은 점을 우물 밖으로 꺼낸 순간, 색시의 손과 아들 붉은 점은 펑하고 합체되어 어린 아들 붉은 점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극의 경민선 작가는 “이전의 삶으로 완벽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발언을 곱씹어보면 이 극의 엔딩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상처의 완벽한 치유와 극복은 상처가 있기 전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어찌되었든 흉터는 남는다. 흉터가 남는 대신 상처가 있던 자리엔 새로 돋아난 살이 자리한다. 결국 상처의 극복은 과거상태로의 회귀가 아닌 새로운 변화이다. 손을 포기하고도 새롭게 살아갈 의지를 복돋우던 색시와, 젊음이라는 새 옷을 입은 아들 붉은 점의 생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맞았다. 극에선 보이지 않지만 상처를 가졌던 다른 이들 역시 각자 새로운 삶을 시작했을 것이다. 변화는 치유의 시작이자, 상처의 극복이다.


물론 밑도 끝도 없이 새로운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색시의 손에 있던 붉은 점, 아들의 손에 있던 붉은 점. 이 동일한 붉은 점은 과거와 새로운 변화의 연결고리다. 변화란 과거가 쌓이고 쌓여 일어나는 결과다.  어찌되었든 우리의 생은 '변화'와 뗄래야 뗄 수 없다.  상처, 변화, 극복, 그리고  새로운 변화. 이것이 어찌보면 가장 단순한 생의 순환인지도 모른다.


                    


 

슬픔과 절망에 몸부림치던 색시, 슬픔을 참고 참다가 결국 삶의 의지를 놓으려던 색시의 모습은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요새 회사를 다니며 '닳아간다'는 표현에 대해 생각할 때가 많은데, 그래서인지 색시의 모습을 보며 사회에 닳아가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물론 칼로 후벼파듯 극심한 색시의 슬픔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이 토해내는 답답함과 가벼운 우울감, 공허함 등이 색시의 아픈 가슴과 비슷하지 않을까 상상했다. 슬픔을 참고 사는 그녀와 공허감을 참고 사는 현대인들은 묘하게 닮았다. 그리고 손이 떠나 생의 의지를 잃은 그녀의 모습 역시 무기력에 빠져 좀비같은 현대인의 모습을 닮아 있다.


이 연극을 보았던 날, 그 날은 날씨가 무척 좋았던 일요일이었다. 마법같던 날씨를 뒤로하고 침대를 뒹굴거리고 싶은 커다란 무기력이 나를 덮치던 날, 나는 의무감에 나간 외출에서 오랜만에 설레는 변화를 맞았다. 절망에 허우적 거리던 색시를 일으킨 건 아들 붉은  점이었지만, 무기력에 허우적거리던 나를 일으킨 건 이 '손없는 색시' 공연이었다. 나에겐 이 공연이 일종의 붉은 점이었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한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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