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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May 10. 2018

나 역시도 김지영이었음을 알게 되기까지

82년생 김지영



 한국의 혐오사회 속 지극히 평범한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 하이퍼리얼리즘 픽션, <82년생 김지영>은 작년부터 시작된 열풍을 지금까지 이어오며 사회 전체에 현실을 담담하게 고발하는 데 성공한다. ‘김지영’은 한국의 여성을 나타내는 대명사가 되었고, 이 책은 사회에 번지기 시작한 ‘미투 운동’과 함께 여성의 개별적인 경험들을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정립시키며 여성의 용기 있는 고백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이 책은 소설이지만 사실상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명료한 기승전결의 서사를 갖춘 것도 아니고 전개가 역동적이지도 않으며 평범한 여성의 평범한 인생을 3인칭 시점으로 건조하게 기술할 뿐이다. 그러나 이 ‘평범한’ 이야기를 마주하는 데에 왠지 모를 두려움이 있었다. 베스트셀러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면서도 수많은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는 이 책에 한번쯤은 흥미를 느낄 법도 한데, 작품과의 만남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극사실주의에 가까운 현실의 묘사에 화가 나고 답답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성차별의 현실을 온몸으로 부닥치며 견뎌내는 중에 책에서까지 그 현실을 맞닥뜨리며 고통스러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걱정했던 감정의 격동은 전혀 없었다. 너무나 당연하고 일상적인 사건들의 나열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작품 속 현실보다 나 역시도 김지영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당연한 사실은 그 어떤 것보다 파괴적인 결과를 불러오고 있었다.




언어를 상실하다



 이 책은 김지영 씨가 점차 말을 잃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유년기에는 남동생에게 편향된 부모님의 지원에 자신의 욕구를 표현할 수 없었고 청소년기에는 자신을 괴롭히는 남학우가 사실은 자신을 ‘좋아해서’ 그랬을 거라는 위로에 불만을 삼켜야 했다. 여자라는 이유로 면접 대상에서 배제되어 노동시장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못하고 출산과 양육에 대해 모든 역할을 지면서도 그에 대해 거부하지 못한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다. 할 말이 있어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언어라는 것은 쓰여야, 즉 대화할 상대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 대화는 서로의 견해를 주고받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지영 씨와 대화할 상대는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대화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사회의 ‘수단’이다. 들어줄 이가 없는 세상에서 김지영은 할 말을 계속 삼키고, 주저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점차 언어를 잃어가고 종국에는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리기까지 한다. 필자 역시 오랫동안 언어를 잃었다. 남성의 것이 우월하다고 생각했고 남성의 기준에 맞추고자 남성의 언어로 말을 했다. 그것은 물론 나 스스로의 것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세계였다. 남성을 우월하다고 규정해야 옳은 것으로 간주하고 대화에 응해주었다. 스스로의 말을 잃고 언어를 규제당한 자들은 사회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존의 사고과정을 뜯어고친다.




지어내다



 자신의 언어를 잃은 김지영 씨는 다른 사람의 언어를 통해 설움을 배설한다. 언어를 잃은 자가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방법이다. 그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를 통해 자신을 지어내야 했다. 그렇게 여성은 사회가 규정하는 옳고 그름에 맞추어 새로운 도식을 조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탓이 아니지만,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아무런 존재도 될 수 없게 만드는 사회에서 여성은 모든 게 자신의 탓인 세계를 구축한다.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여성은 입을 닫고 있거나, 김지영 씨처럼 다른 사람이 되거나, 다른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사회는 어떻게든 여성 자신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삭제되다



 결국 여성은 삭제된다. 그것은 폭압적인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 여아를 향한 가족들의 실망, 남성을 낳지 못한 어머니의 죄책감, 남자애가 사실은 너를 좋아해서 괴롭히는 것이라는 선생님들의 위로, 옷차림을 조심하라는 걱정과 조언, 회사는 남성을 필요로 한다는 변명,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지워지는 책임감···. 사회는 직접 여성의 입을 막지 않는다. 사람 좋은 웃음을 띤 채 간접적이고 은근하게 다가와 여성 스스로 그 이름을 지우게 한다.



 결국 다른 사람의 언어로 말을 하는 김지영 씨는 한 개인을 없애버리는 과정의 끝을 보여준다. 언어, 자아, 그리고 세계의 파괴이다. 그렇게 사회는 여성을 모두 김지영으로 치환해버리며 그들의 구역을 한 칸씩 삭제한다.




그럼에도 나는 김지영이다



 절망하고 싶지 않았다. 여성인 내가 삭제의 대상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은 결말을 맞는 ‘김지영’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여성 아이돌이 이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된 것처럼, 여성은 자신의 현실을 인식하고 김지영임을 인정하는 순간까지 속박당한다.


 그럼에도 나는 김지영이다. 이 책은 오히려 인정의 과정을 통해 여성이라서 가져야 했던 이유 없는 죄책감을 일소시켜준다. 이 책은 현실을 고발하면서도 사회가 앗아가 버린 김지영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비록 그것은 부지불식간에 소거되어 버리지만, 그 과정을 목격하는 독자들은 그 가능성이 흔히 알던 것과 다르게 여성으로서의 열등감에서 기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내가 구축했던 세상이 진정 내 세상이 아닐 수도 있듯, 내가 규정했던 여성으로서의 부정성 역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김지영으로 만든 것은 내가 아니었다.

     

이미지 출처 책 끝을 접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김지영임을 인식하는 순간이 나의 세계를 지키는 첫 발걸음이 되었다. 여성의 잘못이라고 여겨왔던 것이 사실 여성의 잘못이 아니었다는 간단한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일체의 꾸밈이 없는 거울을 보고 자신의 모습을 점검하고 개선하듯, 현실을 가감 없이 기술하는 이 책 역시 그 어떤 서사보다 강렬하게 나 자신을 그리고 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김지영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김지영이 인제 그만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를 잃고, 다른 사람의 언어를 빌리고,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번거로운 과정 없이도 여성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의 세계도 통용될 수 있는 사회를 바란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조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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