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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Aug 08. 2019

프라이드의 소멸을 꿈꾸며, 연극 '프라이드'

그 전까지는 충분히 사랑하겠습니다

 

당신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나요?

  

새벽, 참 많은 생각을 불러오는 시간이다. 특히 후덥지근한 여름 공기 사이로 벌레 울음소리 내지는 풀이 뒤엉키는 청량한 소음이 흘러올 8월의 새벽이라면 더더욱. 이런 시간이라면 마감일이 열흘이나 지날 동안 어떤 말로 이 극을 곱씹어야 할지 고민하던 나도 글을 풀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쓰기 시작하는, 다분히 감성적이고 주관적인 후기. 당신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면 한 번쯤 관람해도 좋을 ‘프라이드’, 어떤 자부심에 관한 단상이다.


공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아니, 꼭 공연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 같다. 어느 순간, 아주 갑자기, 아무런 맥락 없이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불현 듯 머릿속을 강타할 때가 있다는 걸. 나는 그 대상이 공연이니 주어를 공연으로 하겠다. ‘아! 프라이드 보고 싶다.’ ‘아! 지크슈(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보고 싶다.’ 이런 탄식과도 같은 그리움이 마구 끓어오르는 시간이 있다.

 

 

얼마 전 나는 갑작스럽게 ‘프라이드’가 보고 싶어졌고, 그래서 보러 갔다. 이유는 단지 ‘비가 오기 때문’이었다. 극 중에서 “밖에 비 XX(순화: 매우) 와!”라는 대사가 존재하는데, 비가 오면 늘 이 대사와 ‘프라이드’가 생각난다. 그리고 그날도 비가 왔다. 비가 온다 -> ‘프라이드’가 공연 중이다 -> 따라서 나는 프라이드를 보러 간다. 이런 논리적인 삼단논법에 의거해 2년 만에 ‘프라이드’를 관람했다.


‘프라이드’는 극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퀴어에 관한 이야기다. 명대사를 꼽자니 극이 시작되는 1막 1장부터 막을 내리는 2막 5장까지 한 문장도 빠짐없이 언급해야 할 것 같아 생략한다. 번역이 이렇게나 아름다울 수 있다니, 하며 감탄한 몇 안 되는 극 중 하나가 ‘프라이드’였다. 그만큼 대본이 훌륭하고,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 역시 무게감이 있어 애정하는 극이다.

 

 

‘프라이드’의 공간적 배경은 영국 런던, 시간적 배경은 1958년과 2008년이다. 매 장마다 1958년과 2008년이 교차하며 서로 다른 듯 같은 이야기를 전개한다. 50년의 시차가 있지만 인물의 이름은 필립, 올리버, 그리고 실비아로 모두 같고(동명이인이다), 필립과 올리버가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점, 실비아는 이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한다는 점 역시 공통적이다.


1958년의 필립과 실비아는 부부사이로, 필립은 자신이 올리버를 사랑한다는 것을 끊임없이 부인한다. 반면 올리버는 필립에게 솔직해질 것을, 자신을 너무 옭아매지 않을 것을 당부하며 사랑을 고백하는 인물이다. 2008년의 올리버는 오럴 섹스 중독 탓에 필립과 결별 위기에까지 봉착한다는 점에서 50년의 시간이 만들어 낸 변화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하자면 1958년의 필립과 올리버, 그리고 2008년의 필립과 올리버 사이에 나타난 변화는 우리 사회의 변화를 나타낸다.


이 극이 말하고자 하는 단 하나의 단어는 ‘변화’다. 그 목소리에서 시작되는 변화, 그게 사는 이유가 아닐까? 라는 극중 대사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극에서는 변화가 종결된 완전체의 사회를 보여주지 않는다. 완성된 변화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성정체성과 인생 전체를 부인하며 병원에까지 찾아가 말도 안 되는 “치료”를 받던 1958년의 필립이 2019년이라 하여 없을 리 없다. 우리는 아직 변화의 물결 그 한 가운데에 서 있으므로.

 

상세 페이지 인물 소개 중

 

하지만 그 ‘변화’가 실비아의 인생에서는 어떻게 드러났나. 남편이 외도를 했다는 사실보다 그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행복의 길로 나서기를 바라는 여성 캐릭터 1958 실비아는 50년 후 어떻게 변화했을까. 2008년의 그는 ‘너보다 내가 먼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대사를 스스럼없이 뱉으며 퀴어 퍼레이드에 앞장 서 참가하는 이성애자로 그려진다. 타인의 행복보다 나 자신에게 집중할 줄 아는 사람, 그러면서도 퀴어 문제에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관심을 갖는 스트레이트.


‘프라이드’는 분명 좋은 극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완벽은 있을 수 없다. 58년의 필립과 올리버가 겪는 문제에서 실비아는 한 발짝 물러서 있다. 언제나 모두를 포용하는 완벽한 캐릭터, 그 완벽성에서 오는 아쉬움은 2008년에서도 해결되지 못했다. 2008년의 실비아 역시 완벽하다. 게이 커플인 필립과 올리버를 언제나 지지해주며, 연애 상담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너무나 이상적인 이성애자 여성, 그가 바로 실비아다.


물론 인생의 중심을 남성, 그것도 ‘남편’에서 자신으로 옮겨왔다는 것 자체에서 여성주의적 맥락을 탐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성주의적 맥락이 조금씩 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에서 자아로, 너에서 나로, 객체에서 주체로 이동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았고, 이젠 남성을 위해 희생하는 여성 프레임은 현실에서도 손가락질 받는 유교적 클리셰가 아닐까 싶다.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다. 소멸되었다는 게 아니다.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극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을 멈추지는 않았다. “섹스 앤 더 시티가 여자 애들 다 망쳤어!”와 같은 여성혐오적 대사가 지워졌다는 것만 봐도 ‘프라이드’가 머물러 있지만은 않다는 걸 알 수 있다.


‘낡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불쾌한 감각은 잠시만 치워 두고, 이제 ‘프라이드’의 낡음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한다. 프라이드의 메시지는 지극히 이상적이면서, 동시에 너무나 당연하다. 과거의 퀴어 혐오와 현재의 퀴어 혐오, 그리고 우리가 나아갈 방향. 이 단순한 문장을 180분 동안 풀어가는 극이 ‘프라이드’다. 그래, 너무 당연한 문장이다. 하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이 문장이 단순하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가 보다.

 

 

2년 전 내가 이 극을 처음 접했을 때, 실비아 캐릭터에 대해 아쉬움을 느끼지도 않았고 ‘프라이드’가 조금씩 낡아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막 5장에서 등장하는 폭력적 장면 역시 나에게 별다른 불쾌감을 주지 못했다. 그리고 2년 동안 조금 더 변화한 내가 2017년보다 조금 더 다듬어진 ‘프라이드’를 관람했을 때 새로운 아쉬움과 새로운 낡음을 관찰했다. 사실 ‘프라이드’가 전해야 할 진짜 메시지는 이 낡음에서 오는 게 아닐까.


여성 문제와 퀴어 문제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꽤나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감자다. 퀴어 이슈는 여성 문제보다 비교적 더딘 속도로 변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온갖 서점과 극장에 깔리다시피 한 퀴어 창작물을 보면 퀴어에 대한 생각이 확장될 대로 확장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단순히 ‘동성을 사랑해서 슬픈 나’에 취한 캐릭터가 비관을 토해내는 서사에 그치지 않고, 퀴어라는 소수자성이 파생하는 다양한 맥락을 아우른다는 점에서 퀴어 문학과 퀴어 공연이 꽤나 기껍다.


그러면서 동시에 언제까지 ‘프라이드’가 올라와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언제까지 이 메시지가 유효할 것인가에 대해서. 지극히 당연하고 너무나 단순한 ‘변화’, 이 두 글자를 180분 동안 차근차근 이야기해야 할 시대는 언제쯤 종말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프라이드’는 좋은 극이다. 아름다운 대사와 묵직한 메시지를 안고 있는 좋은 극. 그러나 완벽할 수 없는 극이다. 완벽해서는 안 되는 극이다. '프라이드'의 메시지는 완벽한 이상적 상한선이 아니라 최소한 도달해야 할 기본적 하한선이 되어야 한다.


2막 5장이 끝난 후, 1958, 2008이라는 숫자가 차례로 지나가고는 2019, 이 네 글자가 벽에 비추어졌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이 극이 처음 공연되었던 2008년이 벌써 10년도 더 지난 시간인 것처럼, 연극 ‘프라이드’ 역시 언젠가 지나칠 과거 한 시점이라는 이면적 메시지를 드러낸 것만 같아서 자꾸만 그 장면을 곱씹게 되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미래는 ‘프라이드’의 소멸이다.

 

 

하지만 그 전까지 난 ‘프라이드’를 사랑하겠지. 그 시점이 오기 전까지는 비가 올 때면 항상 ‘아! 프라이드 보고 싶다.’고 외치겠지.


오늘의 인터미션 넘버는 ‘프라이드’ 1막 4장 삽입곡인 차이코프스키의 녹턴 No.4입니다. 그리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 한 번 읽고 가세요. 웬만하면 한 번 보러 가세요. 이렇게 좋은 대사를 세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습니다. 의자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으니 허리를 조심하시고, 극장 내부가 굉장히 싸늘하니 겉옷도 챙기시고요. 이 극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당신이 당신에게 닿을 때까지.

 

  

그렇게만 들렸어요.
들었다기보다는 울렸습니다.
괜찮아질 거라고.
기나긴 시간이 흐르면, 우리에 대해, 또 자신에 대해
이 어렵고 불안했던 순간들을 이해할 것이고
그리고 지금의 잠 못 이루는 밤들도 가치가 있었다, 깨닫게 될 것이다.
어쩌면 오십 년, 아니, 오백 년 후의 이 시점을 사는 사람들은
그 시간들로 인해 더 행복하고 현명해질 것이다.
그러니 괜찮아. 모든 것이 다 괜찮아질 거야.
마치 먼 미래에, 모든 것을 다 거친 내가 위로하듯
다정한 속삭임, 위안처럼, 목소리가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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