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진 퀸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올해 초, 뒤샹의 ‘샘’이 사실은 여성 작가의 작품이라는 가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샹이라는 신화가 무너지지 않는 이유를 고찰하며 미술계에 고착된 차별적 관행과 인식을 지적한 적이 있다. 고상한 미술계의 민낯을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 이후로 불편한 것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기존 체제에 대한 반격과 새로움을 기치로 걸면서도 여성 작가의 전시는 열리지 않는 미술관, 주류 미술에 저항하자고 외치면서 실상은 카르텔의 혜택을 누리는 유명 작가, 여성 작가들의 작품은 한데 분리해놓아 ‘페미니즘 미술’이라는 제목의 한 시간짜리 수업으로 추리고 그 외 시간엔 남성 작가들의 것만 배우는 미술사 수업. 부끄럽게도, 좋아했던 것들이기도 하다.
모든 역사가 그렇지만 미술사 역시 남성 위주로 구성되어왔다. 앞에서 언급했듯 지금도 그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은 기조로 유지되고 있다. 미국 최대 미술관인 메트로폴리탄에 전시된 작품의 단 5%만이 여성 작가의 것이며, 누드화의 85%는 여성 누드화라는 사실만 봐도 주류 미술이 얼마나 불평등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는지 여실히 알 수 있다.
여성이 미술사에 기록되지 않거나 지워지며 철저히 ‘뮤즈’로만 남는 관습은 현재진행 중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난 역사에 대한 성찰이 부재한 상태에서 더욱 견고해진다.
“당신은 여성 미술가 다섯 명의 이름을 댈 수 있는가?” 2017년 미국 국립여성화가미술관이 실시한 이벤트에서 제기된 질문이다. ‘여성’이라는 수식언이 없었다면 대부분이 (주로 남성 예술가의 이름으로)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이 질문은 반면 여성이 예술계에서 얼마나 배제적인 존재인지 실감하게 한다. ‘페미니즘 미술’로 뭉뚱그려 분류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역사적인 가치를 갖는 작품들은 강요된 익명성 아래서 사라지고 잊히기 마련이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이고도 꾸준하게 누락된, 왜곡된 역사다.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작업은 누락된 누군가를 다시금 기입하는 것, 즉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이 책은 바로크 시대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시대 속에서 미술사에 의미 있는 족적을 남긴 여성 예술가 15인을 조명하며 역사에서 누락된 그들의 이름을 새롭게 기입하고자 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유딧 레이스터르, 아델라이드 라비르귀아르, 마리 드니즈 빌레르, 로자 보뇌르, 에드모니아 루이스, 파울라 모데르존베커, 버네사 벨, 앨리스 닐, 리 크래스너, 루이즈 부르주아, 루스 아사와, 아나 멘디에타, 카라 워커, 수전 오말리 등 다양한 시대와 사조, 장르를 넘나드는 여성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전기 형식에 담아 기술한다.
책을 펼치는 순간 가장 먼저 독자를 맞는 인물은 강렬한 유디트 그림으로 유명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흔히 ‘젠틸레스키’라고 불리지만 저자는 위대한 미술가들은 보통 이름으로 불린다는 점을 고려하여 ‘아르테미시아’로 부르기로 한다)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던 H.W.핸슨의 ‘서양 미술사’에 등장한 첫 여성 예술가이기도 하다. 유디트가 눈 깜짝 않고 적장의 목을 베는 장면을 다른 작가의 것과 다르게 직접적이고도 의연하게 그려낸 이 작품은, 자신의 진영을 위협하는 것을 거침없이 숙청하는 여성의 모습에서 오는 쾌감을 느끼게 하며 궁극적으로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책은 과거, 현재, 미래 그 모든 역사를 통틀어 여성이 지워지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서술한다.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과정, 예술가로서의 활동, 후대의 평가에서 모두 여성이라는 수식언은 제약의 이유가 된다. 아르테미시아가 강간의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 화가로서 치명적일 수 있는 손가락 고문을 감내해야 했다는 사실은 당시 여성 예술가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사회적 상황이 얼마나 척박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말 그림으로 유명한 로자 보뇌르는 여성에게 금지된 남성복을 입지 않으면 추행을 당하기 쉬운 말 시장에 남성복을 입어도 된다는 허가증을 받고 나서야 입장할 수 있었다.
제약은 붓을 쥔 후에도 가해진다. 예술가로서 이름이 조금이라도 알려지면 유명 남성 예술가와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퍼져 혼자 일궈낸 명성이 아니라는 여론이 조성되고, 결혼 후에는 여성이 커리어를 포기하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여겨진다. 예술가를 향한 질 낮은 인신공격과 외모 비방은 물론이다. 조각가 에드모니아 루이스는 평가절하를 위한 어떠한 빌미도 제공하지 않기 위해 작품을 위해 조수를 고용하는 통상적인 일조차 하지 않았다. 여성에게만 주어지는 박한 기준은 후대에도 마찬가지다. 작가가 밝혀지지 않았을 땐 미술계가 뒤집어질 듯 극찬을 받았던 작품이 여성의 것임이 밝혀진 후에는 결점 가득한 ‘여성적인 작품’으로 둔갑한다.
그러나 위대한 예술가들은 굴하지 않았다. 책은 여성이 마주해야 했던 당시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속에서 끊임없이 진보하며 역동적으로 자신의 획을 그어갔던 그들의 업적을 기술한다.
아르테미시아가 예술의 의인화 도상인 ‘라 피투라’의 입에 물려 있던 재갈을 벗겨 그린 것, 앨리스 닐이 누드 자화상을 그리며 ‘여성미’에 반하는 요소였던 안경과 노쇠한 몸, 흰머리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 에드모니아 루이스가 남성을 유혹하는 ‘헤픈 여자’로 주로 묘사되었던 클레오파트라를 자신의 의지로 죽음을 실현한 주체적 군주의 이미지로 묘사한 것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던 ‘여성성’의 의미를 개성 있는 예술 의지로 통쾌하게 전복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여성성을 묘사한 방법에 초점을 맞추지 않아도 저마다 위대한 미술사적 의의를 갖는다. 아르테미시아는 특유의 해부학적 기량과 시선을 사로잡는 명암 대조로 카라바조를 완벽히 계승한 유일한 예술가로 지목되며, 에드모니아 루이스의 조각은 조수도 없이 홀로 작품을 제작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섬세함을 보인다. 아나 멘디에타는 대지미술과 페미니즘, 행위예술, 개념미술, 사진, 필름 등 다양한 매체를 결합해 완전히 새로운 예술 형태를 창안한 선구자의 모습을 보여줬고 수전 오말리의 타이핑 회화는 지금도 현대인들의 일상에 살아 숨 쉬며 유쾌한 에너지를 뿜어내고 있다. 정당한 이유 없이 좋은 작품을 만날 기회를 제한해 온 모든 것들이 원망스러워지기도 한다.
또한 아내나 딸로서가 아닌 여성과의 관계를 비중 있게 기술한 점이 인상적이다. 이를테면 마리 드니즈 빌레르가 그린 샤를로트 뒤발 도녜의 초상이 정치적 혼란 속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던 두 여성의 우연적이고도 낭만적인 연대 속에서 탄생했다는 것과 버네사 벨이 동생인 버지니아 울프와 ‘여성의 동지적 메시지를 나누는’ 관계를 유지하며 예술적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 처음 알았지만, 동료로서의 여성 연대가 위대한 여성 예술가가 만들어지는 환경적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그들의 가부장제 내 관계보다 훨씬 더 역사적으로 내리 기억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칼 안드레가 구겐하임에 있다. 아나 멘디에타는 어디있는가?” 여성 예술가는 단 한 사람, 소수인종 예술가는 없는 미술관에 아내인 아나 멘디에타를 죽였다는 혐의로 기소된 남편 칼 안드레의 작품은 버젓이 전시된 것에 반발한 시위 단체의 문구다.
이런 미술관을 산책하며 여성 예술가의 꿈을 키울 수 있을까. 어렸을 적 예술가 전집에 여성이 한 명도 없는 것을 보며 느꼈던 상실감이 이번 세대에서 단절되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소망이 책장을 타고 마음에 흘러왔다.
아나 멘디에타는 어디 있는가?
그녀는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 257p
이름을 기억하는 행위는 언제나 애틋하지만, 그것이 여성의 이름이면 더욱 완강하게 수행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림에 서명을 적어 넣는 흔한 일조차 허락되지 않았던 그들이기에, 기억된다 해도 그저 여성 예술가 중 한 명으로만 기억되던 그들이기에 더욱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고 싶다.
누군가가 기억하고 부르는 이들의 이름은 그 자체로 용기를 주며, 자신도 마찬가지로 불리고 싶다는 목적의식을 갖게 한다.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는 또 다른 아나 멘디에타들이 각자의 이름으로 더욱 온전한 역사의 주인공이 되길 바란다. 새롭게 구성될 미술사, 새롭게 펼쳐질 미술사의 중심에 모두 그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