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다시 쓸 때까지] 11.
혼자 남겨진 시간. 잘린 뒤 튕겨져 나간 손톱처럼 '우두커니'의 구석으로 구겨져야 할 때. 나는 주로 벌떡 일어나 청소를 한다.
창문을 열고 청소기를 돌리고 밀린 설거지를 해치우고 널브러진 옷들을 제자리에 걸어놓고 바닥에 뒹구는 책들을 책장과 책상 위에 다시 올려둔다. 이리저리 밖으로 나와있는 스킨로션과 립스틱 따위들은 화장대 안쪽으로 밀어 넣은 다음, 분류해 놓은 쓰레기를 비운다. 그리고 마지막 차례는 빨래 돌리기. 물론 그때그때 순서가 달라질 수는 있다.
이 모든 과정은 내게 '청소'가 아닌 일종의 '수리'와 같다. 무언가를 고치는 행위인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팔을 힘껏 뻗으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몸을 써서 모든 것을 모든 것의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일. 그래야만 하는 강박. 폭풍이 지나간 후, 뚫린 지붕을 메울 때의 열심과 같다. 쓰레기와 물건들이 마침내 가야 할 자리로 돌아가고 쾌적해지면, 비로소 슬픔이 뛰놀기 안전한 무대가 마련된다. 나는 그때 운다.
누구에게나 그런 '슬픈 소일거리의 시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섣불리 위로하지 않고, 보다 잘 슬프기 위해 혹은 잘 다스리기 위해 더 휘청거리는 시간 말이다. 내가 청소를 하는 마음은 야식이나 쇼핑으로 소비해버리는 휘발성 욕구 해소와 다르다.
오히려 생존을 위해 움츠리고 도사리는 움직임과 가깝기 때문이다. 잘 싸우기 위해 적막 속에서 때를 기다리며 몸을 보수하고 빗고 때우는 행위다. 그러니 나의 '습관성 청소'는 일상적인 청소와 다르다. 완전한 몰입이 이뤄지지만 청소를 위한 청소가 아니기에.
어떤 이에겐 그 습관이 뜨거운 물을 끼얹으며 샤워를 하는 게 될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겐 다음 날 먹을 김치찌개를 끓이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이따금 나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이들이 혼자 남겨진 시간 속에서 자기만의 슬픈 소일거리를 어떻게 풀어갈지 멋대로 그려보곤 한다. 쳐진 어깨너머로 빨랫감을 널고 개는 얇은 손, 바닥을 닦느라 불편하게 휘어진 등. 그런 모습들은 와락 안아주고 싶다거나 마냥 쓸쓸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어째서인지 조금도 방해하고 싶지 않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한 남자는 슬플 때 주로 어슬렁거린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밴드 음악을 튼 다음 볼륨을 잔뜩 높인다. 그리고 집 안에 있는 모든 조명을 끄고 우리에 갇힌 고양잇과 짐승처럼 거실을 느리게 빙글빙글 걷는 것이다. 역시,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는 마음이 진정되면 다시 조명을 밝히고 조용히 방으로 들어간다.
자신의 털을 핥는 고양이처럼, 슬픔을 그루밍하는 혀는 저마다에게 장착되어 있다. 그 혀가 부러지지 않는 이상 우리는 혼자일 때 어떻게든 혼자를 견딜 수 있다. 허술하고 깨지기 쉬운 삶을 뒤집고 닦고 요리하고 어슬렁거리며 수리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는 터지는 한숨과 눈물을 막지 않고 생의 비릿한 호흡을 내쉬어 볼 수도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하나다. 혼자 남겨진 시간 속에서 모두가 무탈하게 걸어 나와 훨씬 덜 부서지며 살아갈 수 있기를. 진짜 끝날 때까지 덜 부서지며 살기를. 사람이 강해지려면 얼마나 장수해야 할까 하는 바보 같은 의문이 뒤따르긴 하지만, 우리는 어쨌거나 미래로, 예정된 슬픔이 잉태된 미래로 간다.
그러니 사람은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을 최대한으로 동원하는 수밖에 없다. 그 '수'는 믿음직스럽진 않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나일 수 있다는 희망만큼은 조금도 슬프지 않다. 혼자 남겨져도, 혼자는 혼자를 배신하지 않는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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