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퀸덤> 얘기로 여기저기가 뜨겁다. 엠넷에서 방영 중인 <퀸덤>은 마마무, 아이들, 러블리즈, 박봄, AOA, 오마이걸 등 여성 아이돌 여섯 팀이 나와 무대를 꾸민 후 한 날 한 시에 음원을 공개하여 '컴백 전쟁'을 벌인다는 내용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방영 초기에는 시장 상황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음반 발매 시기를 조율하는 합리적인 과정을 '꼼수'로 치부한다는 점, 공정을 추구하면서 역설적으로 무가치한 경쟁을 과열시킨다는 점, 여성들 간의 경쟁을 기 싸움이나 캣파이트로 콘텐츠화한 전적이 허다한 방송사가 악의적인 편집으로 또다시 ‘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에 여성을 가두려 한다는 점 등으로 부정적인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회의 공연과 4회의 방영을 마친 지금, <퀸덤>은 우려했던 부분과 놀랍도록 정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동안 TV, 특히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아이돌을 비추는 방식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이상형 월드컵의 후보이거나 나이 많은 유명 MC들 사이의 ‘홍일점’, 혹은 '섹시 댄스'와 애교, 잘 웃는 리액션의 소유자로 위치되어 분위기를 화사하게 하는 '꽃' 같은 존재여야 했다. 그들이 ‘아티스트’라는 점은 모두가 까맣게 잊은 채 예능계 남성 카르텔을 받치는 도구로서 소모하기만 했다. 여성들이 나와 전문성을 경쟁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마저도 대부분 그들의 감정적 경쟁에 지나치게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
<퀸덤> 역시 여성 간 경쟁 구도에서 유발되는 긴장감과 재미를 의도한다. 경연이 끝나고 각 팀이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팀과 못했다고 생각하는 팀을 하나씩 골라서 투표하게 하고 그 투표 내용을 공개하게 하는 룰은 프로그램이 참여자들의 감정적 경쟁을 콘텐츠화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첫 회에 모든 팀이 모였을 때 방송 상으로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하는 듯한 분위기가 시종 강조되었고 한 팀이 특정 팀을 모른다고 언급한 부분은 유독 강조된 편집과 함께 인터넷 상에서 재생산되며 무례한 행위라고 도마 위에 오르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 서두에 언급했지만 엄연한 전략을 가치절하하며 정당한 경쟁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오히려 경쟁의 과열을 부추긴다는 점에서도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방송사가 예견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다. 무대와 실력에 주목받을 기회가 생긴 가수들은 경쟁에서의 승리보다 양질의 공연에 집중했다. 순위에 큰 영향을 줄 공연 순서를 자체적으로 정하는 부분에서 방송사는 유리한 순서를 향한 신경전을 기대했을 테지만 가수들은 전체적인 공연의 흐름과 팀의 색깔을 고려하여 순서의 균형을 맞췄고 모두의 타협과 동의가 순조롭게 이뤄졌다. 무대를 기획하는 과정에서는 각자의 음악성과 개성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를 아티스트로서 존중했으며 그 사이에서 자신이 취할 수 있는 경쟁력과 역할을 치열하게 고민했고 최선을 다해 경쟁에 임했다. 여성 아이돌로서 공유하고 있는 목표 의식과 연대를 바탕으로 그들은 작정하고 벌여진 싸움판을 따돌리고 시청자들이 오로지 무대에 집중할 수 있게끔 영리하게 그들의 리그를 조성하고 있다.
새로운 리그가 조성되니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났다. 철저한 프로듀싱 하에 자의와 상관없는 소비 맥락에 위치되어야 했던 아티스트들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놀라운 무대를 선보였다. AOA는 리더 지민의 프로듀싱 하에 몸 선이 드러나지 않는 검정 수트를 입고 짙은 화장과 하이힐과 함께 보깅을 하는 남성 댄서들과 함께 ‘너나 해’ 무대를 선보이며 자신을 꽃이 아닌 나무라고 소개했고, 오마이걸은 러블리즈의 노래를 국악이라는 생소한 장르로 편곡했음에도 자신의 색깔을 완벽하게 녹여내 극찬을 받았다. 이미 실력적으로 유명하지만, 가장 연차가 낮은 '막내' 그룹인데도 1차 경연에서 1위를 차지했던 (여자)아이들의 독특한 무대가 멤버 전소연의 자체적인 프로듀싱 끝에 탄생한 작품이라는 사실은 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그들이 일궈낸 결과 앞에 누가 이길 것인가에 대한 추측은 이미 관심 밖이다. 사람들은 AOA의 미러링이 케이팝 시장에서 갖는 의미와 영향력을 논하고 오마이걸을 주제로 걸그룹 컨셉의 다양성을 탐구하며 (여자)아이들을 보고 여태 도외시되었던 여성 아이돌의 프로듀싱 능력에 주목한다. 담론의 확장이 일어나고 있다.
프로그램에 쏠리는 관심과 더불어 거대해진 담론은 새로운 차원의 우려를 낳기도 했다. 단기간에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가수들의 의욕이 모두 '걸 크러쉬' 컨셉으로 수렴되어 자칫 획일화나 개성의 상실을 야기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거칠고 강렬한 ‘걸 크러쉬’ 컨셉이 여리고 부드러운, 소위 ‘여성적’이라고 명명되는 컨셉보다 무조건적인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단지 시장에서 보기 드물다는 이유로 도전이 난무한다면 각자의 개성을 잃게 되어 결국 모양만이 다를 뿐 프로그램 이전의 제한적인 담론으로 회귀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일고 있다.
가령 ‘청순 걸그룹’이라고 단순하게 범주화되었던 오마이걸과 러블리즈는 경연곡을 선정할 때 서로 컨셉이 중복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가장 먼저 표하며 기존 컨셉의 변형 여부를 중점적인 과제로 인식하는데, 동일한 컨셉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도 '청순'의 이미지가 갖는 범주의 한계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은 '걸 크러쉬' 역시 한정적인 의미의 컨셉임에도 불구하고(심지어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한계를 타개할 주요한 선택지로 고려할 수밖에 없는 '청순 걸그룹'이 당면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인지해야 할 것은, 여성 아이돌에게는 컨셉을 선택할 기회는커녕 새로운 컨셉을 시도할 기회조차 희박했다는 사실이다. 남성 아이돌에 비해 팬덤보다 대중을 타겟팅해야 하는 상황에 자주 놓여야 했던 여성 아이돌들은 개성을 유지하며 마니아층을 확보할 여유가 상대적으로 부족했고 청순과 섹시, 그리고 '걸 크러쉬'라는 납작한 컨셉의 구분 속에서 제한적으로 소비되었다. 그들에게는 선택할 기회도, 선택에 실패할 기회도, 실패한 선택을 동력 삼아 재도약할 기회도 한정적으로 주어졌다. 따라서 선택의 획일화나 몰개성화를 우려하기 이전에 여성 아이돌에게도 선택의 기회가 충분히 제공되고 성패의 원인을 보다 폭넓은 범위에서 탐색할 수 있는 당연한 상황이 구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의 선결을 위해 각자가 당면한 과제를 주도적으로 수행해나가며 서로의 선택을 공감하고 지지하는 아티스트들의 모습은 <퀸덤>에서 강조하는 '공정한 경쟁'이라는 목표 지점에 프로그램의 의도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져버릴 꽃이 되긴 싫어
I'm the tree
- AOA '너나 해' 중
성공과 실패, 기대와 실망, 호평과 혹평이 마구 얽히면서 몸집을 불리고 있는 복잡한 담론 속에서 그럼에도 <퀸덤>에서 여태까지의 예능에서 비치던 도구로서의 여성의 모습만큼은 찾기 힘들다. 프로그램이 지닌 한계점과 모순을 직접 허물며 주도권을 가져간 아티스트들은 예쁘게 피어나 '져버릴 꽃'이 되기를 거부하고, 대신 꽃을 피우다 낙엽을 떨구고 울창한 숲을 이루다가도 홀로 남아 찬바람을 견디며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나무가 되어 끝없이 자라나기를 택했다. 녹록지 않은 길을 택한 그들이 그럼에도 계속해서 예상치 못한 열매를 맺고 있다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궁극적 성취를 쉽게 예상할 수 없는 이유이다.
<퀸덤>의 우승 상품은 AOA 설현이 “인기 많은 남자 아이돌의 특권”이라고 언급한 단독 컴백쇼 런칭이다. 프로그램은 “남자 아이돌의 특권”을 여자 아이돌에게 내려지는 포상으로 제안했지만, <퀸덤>에선 공통된 목표 아래 더 넓은 의미의 ‘특권’에 맞서 도전하는 이들이 내뿜는 전운이 느껴진다. 의미가 전복된 '전쟁'은 회차가 거듭될수록 더욱 정확한 방법과 정교한 방식으로 행해지며 모습을 달리하고 있다.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이 얼마나 거대하고 아름다운 숲을 이루고 있을지 기대된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조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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