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하 들리십니까, 궁 너머 작은 노래가
올해로 건학 621년을 맞이한 성균관대학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전통과 역사를 지녔다. 이렇게 멋진 전통문화와 높은 위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 문화를 살리는 행사가 없을까, 하고 고민했던 민신홍 단장은 칠 년 전 단체를 하나 설립하고 축제를 개최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청랑((구)유생문화기획단)과 고하노라이다. 그리고 지난 주 9월 21일 토요일, 다섯 번째 고하노라인 2019 고하노라가 성공리에 마무리되었다.
청랑(靑朗)은 성균관대학교 공식 학생단체로, 성균인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하여 성균관의 유생문화를 바탕으로 성균관대학교를 대표하는 대학문화를 창조한다. 논술 응원, 황감제, 축제 부스, 신입생 환영회인 신방례 등 청랑이 주관하고 있는 행사는 수없이 많지만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대표적인 축제가 바로 ‘고하노라’이다.
과거 성균관 유생들이 전국의 유생을 대표하여 임금께 건의할 정책을 상소로 올리는 것을 유소라고 하는데, 이는 과거 조선의 임금들이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장려하였을 정도로 국가의 중대한 행사였다. 그리고 고하노라는 이렇게 성균관 유생들과 임금이 소통하던 전통적인 유소 문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하여 음악과 토크를 통해 청년과 공직자가 소통하는 페스티벌이다.
매년 6월, 청랑 SNS에는 고하노라 행진유생으로 참여할 성균관대학교 학생을 모집하는 공고가 올라온다. 행진유생은 황룡단, 주작단, 현무단, 청룡단, 백호단 다섯 개의 단으로 나뉘어 단마다 색이 다른 한복을 입고 행진하게 된다. 대략 300명을 모집하는데 올해는 이틀 만에 마감되었을 정도로 고하노라를 향한 성균인의 관심은 나날이 뜨거워지고 있다.
행진유생은 방학 5주간 청랑이들에게 교육을 받는다. 유소의 역사, 성균관 문묘, 우리가 입게 될 한복에 관련된 지식 등등 행사 참여에 필요한 이론 교육부터 행사에 쓰이는 노래와 춤까지 알차고 재미있는 교육이 준비되어 있다.
자연과학계열과 인문사회계열 캠퍼스가 수원과 서울로 분리되어 있는 성균관대학교 특성상 타 과의 학생들을 접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고하노라는 다양한 학과와 학번의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특별한 만남의 장이다. 함께 즐겁게 교육을 받고, 행사 이후 뒤풀이에서 친목을 다지며 참가자들은 소중한 인연을 만들어 나간다.
그렇다면 유생들은 도대체 유소를 어떻게 올리러 갈까? 고하노라는 크게 상소공모전, 대의사, 소행, 소반비답이라는 네 단계로 나뉜다.
고하노라 한 달 전, 청랑의 SNS에는 매년 그 해의 주제와 함께 상소공모전 공고가 올라온다. 올해의 주제는 교육으로,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한 교육 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상소를 모집받았다. ‘대한민국 청년과 공직자의 소통’이 고하노라가 지향하는 주제인 만큼 성균관대학교 학생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의 청년이라면 모두 상소공모전에 지원할 수 있는데, 실제로 올해의 아원(2등)은 연세대학교 학생이 차지했다.
상소공모전에서 급제하면 최대 200만원의 상금을 받을 수 있고, 고하노라의 소두로서 행진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 성균관대학교 학생은 아니지만 고하노라의 멋진 행렬과 함께하고 싶다면 내년 상소공모전에 참여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상금뿐만 아니라 행렬의 맨 앞에서 누구보다도 신나게 축제를 즐기며, 자신의 의견을 공직자와 300명의 청년들 앞에서 선보일 수 있는 뜻깊은 경험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대의사는 고하노라의 개막식으로, 성균관에서 유생들이 떠나기 전 의지를 다지는 프로그램이다. 고증을 살려 성균관대학교 명륜당과 대성전에서 진행되며, 화압, 봉함, 독소 등 실제 절차를 그대로 재현한다. 청랑이 열심히 준비한 연극과 대사성의 격려사를 통해 유생들은 실제로 임금께 상소를 올리러 떠나는 것 같은 분위기에 흠뻑 취하며 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소행은 성균관에서 궁궐까지 행진하는 소행 의례를 현대적인 퍼레이드로 창조한 것으로, 이번 2019 고하노라의 대표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성균관 문묘에서 출발하여 창경궁과 창덕궁을 거쳐, 인사동 거리를 행진한 뒤 경복궁에 도착하여 민심을 모은 후 혜화 마로니에 공원으로 이동하였다.
소행은 단순히 걷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길 거리가 쏠쏠하다. 먼저 구간마다 장사꾼, 관인, 백동 천동, 아방사령 등등 다양한 NPC들이 실감나는 연기를 통해 즐거움을 더해주었다. 또한 고수유생의 힘찬 북소리와 기수유생의 화려한 깃발 교대식을 통해 화려하고 웅장한 분위기를 만들고, 각 단별 구호와 전체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유생들은 씩씩하고 활기찬 에너지를 뽐냈다.
소행의 하이라이트는 무엇보다도 여름방학동안 열심히 연습했던 10여 가지의 춤과 노래이다. 큰 소리로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간단한 율동과 함께 행진하면서 유생들은 힘든 줄도 모르고 즐겁고 씩씩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특히 인사동 쌈지길 앞과 안국동 사거리에서는 행진을 잠시 멈추어 다 함께 '유소 간다네'와 '그 푸른 도포를'이라는 화려한 플래시몹을 선보였는데, 흥이 넘치는 노래와 춤으로 거리를 둘러싼 수많은 시민들에게 멋진 볼거리를 선사했다.
마지막으로 소반 비답은 종로한복축제와 함께 진행하는 피날레로, 작년에는 광화문 광장에서, 올해는 혜화 마로니에 공원에서 진행되었다. 입장 플래시몹에 사용되는 곡은 유소의 성공을 기원하는 ‘입궐’과 ‘신용비어천가’인데, 웅장하고 장엄한 분위기로 유소를 향한 유생들의 굳은 결의를 엿볼 수 있는 곡이다.
"전하 들리십니까, 궁 너머 작은 노래가. 우리의 값진 목소리가 왕께 닿을 수 있도록 이 상소를 바치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비답을 내려주소서, 주상전하. 천지를 진동시켜, 인왕산에 메아리 쳐. 우리의 값진 땀방울이 왕께 닿을 수 있도록 이 상소를 바치네, 목숨을 걸어서라도 비답을 내려주소서, 주상전하."
플래시몹 후에는 상소에 대한 대답인 비답을 들을 시간이다. 올해는 특별히 교육부 중앙교육연수원 김영철 원장이 직접 상소문에 대한 답을 내려 주었다. 이번 상소공모전에서 당선된 아이디어 중 참신하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많았는데, 실제로 교육부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는 희망찬 대답도 들을 수 있었다.
비답 의례 후 행진유생들이 한데 어우러져 ‘그날의 우리’를 합창하면서 2019 고하노라는, 우리의 뜨거웠던 여름밤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당대 왕족조차도 막을 수 없었던 조선의 공식 행사인 유소. 국가 정책 지향점을 제시하는 유소의 가장 큰 의의는 국가와 유생 간의 소통이다. 고하노라에 참가한 행진유생들은 성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면서 이렇게 소중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었고,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 잊지 못할 특별한 추억을 만들었다.
이번 고하노라에 참여하지 못해서 아쉽거나 고하노라에 관한 더 많은 정보가 궁금하다면, 청랑의 각종 SNS에서 지난 준비과정을 엿볼 수 있다. 유튜브 <성균관대학교 청랑> 채널에는 다양한 행진곡의 안무 영상을 비롯해 청랑이들의 답사 브이로그, 교육 브이로그 등 재미있는 영상들이 준비되어 있고, 페이스북 <성균관대학교 청랑>계정을 통해 알찬 카드 뉴스와 화려한 고하노라 사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올해 고하노라는 다섯 번째 생일을 맞았고, 300명 남짓의 행진유생들이 참여하는 이 커다란 축제를 기획하는 청랑이들은 고작 스물 세 명이다. 아직은 부족한 부분이 너무나도 많기에, 참가자들의 만족도와 행사의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하여 청랑이들은 오늘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성균관대학교만의 고유한 유생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대학문화에 한 획을 그을 청랑의 힘찬 날갯짓에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져 주기를 바란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이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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