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신, 나도 네 꿈을 꿔
영화를 봤다. 참 보길 잘했다.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가 거의 없었다. 엔딩 크레딧이 내려오고 상영관을 나서며 "어땠어?" 묻는 동생에게 주저 없이 "인생 영화야"라고 했다.
나는 가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글을 쓴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음식, 장소, 시간과 같은 것들을 죽 쓰고는 나를 한 번 더 들여다본다. 그렇기에 함부로 무언가에 "내 인생, 내 최고의"와 같은 말을 쓰지 않는다.
예술은 주관적이다. 그렇기에 당신에게도 이 영화가 인생 영화일 거예요! 꼭 보세요!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그런 영화였다고 말하고 싶어서. 덕분에 이 영화에 대해 하고 싶은 말도 많다.
아 참고로 이 영화는 퀴어 영화다. 퀴어 영화에 관심도 없었고 그 유명하다던 '캐롤'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이 영화를 보고 캐롤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관람 후 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 영화의 키워드는 달, 편지, 눈이다. 달은 윤희의 마음이다. 한국과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윤희가 영화 초반 한국에서 바라본 하늘의 달은 초승달이다. 그리고 일본으로 간 후 만월을 보게 된다. 꾹꾹 눌러왔던 윤희의 그믐달 같은 마음은 초승달, 반달을 지나 기어코 일본에 다다라 만월이 되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마사코와 쥰은 눈을 치우며 이런 말을 한다.(대사를 적으며 영화를 본 것이 아니라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눈이 치우면 내리고 또 치우면 내린다고. 자연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어쩌면 눈도 달과 같은 윤희의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원한다고 사라지게 할 수 있는 물건 같은 것이 아니니까. 윤희가 꿈에 나올 때마다 적어내려갔던 쥰의 그 수많은 편지들처럼 전달되지 않은 채 쌓인 마음들이었을 거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시각적으로도 황홀했고 눈을 밟는 소리, 필름 카메라를 찍으면 그 필름이 돌아가는 소리와 같은 것들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나는 서간체를 참 좋아한다. 아주 사적인 그리고 잔잔히 누군가에게 전하는 마음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편지를 쓰는 것도 좋아한다. 감독님도 같은 이유로 편지라는 요소를 넣었다고 한다. 또 감탄한 것은 그 편지 또한 캐릭터에 따라 다르게 설정했다는 것이다. 은유적인 쥰과 직설적인 윤희. SNS 혹은 이메일로 빠르게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 텐데와 같은 고민은 영화가 끝난 후에나 했다.
영화를 보며 '왜 굳이 편지로 마음을 전하지?'와 같은 생각은 들지도 않았으니까. 편지라서 더 애틋했다. 한자 한자 손으로 느리게 써 내려간 글은 그것이 수신인에게 닿을 때까지도 참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더 애틋했다. 편지도 필름 카메라도 이 영화에 담긴 아날로그적 요소들이 더 영화를 깊게 만들어준 것 같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영화 안에 있었고,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것 투성이었다. (쥰과 마사코가 키우는 고양이도 너무 귀여웠다. 그 귀여움에 등장할 때마다 마음속에서 행성을 하나씩 부쉈다.)
함께 영화를 본 동생은 이 영화가 채도 있는 일본 영화 같다고 했다. 표현이 정말 더할 나위 없이 명확하다고 생각했고, 그 표현을 시작을 꽤 많은 생각을 했다. 일본 영화라고 하기에는 선명하고 한국 영화라고 하기에는 희미했다. 그 오묘함이 좋았다. 윤희와 쥰 사이의 감정선 또한 그랬고. 영화를 채도 있게 만든 요소 중 하나가 새봄과 경수라고 생각했다. 채도 낮은 혹은 무채색의 영화에서 유일하게 채도 높은 색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 사랑이 하얀 눈만큼이나 순수하고 눈부셨다.
또 새봄과 마사코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끝까지 끌고 간 인물이다. 이 캐릭터들이 없었다면 영화는 그냥 그런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 두 캐릭터가 가진 매력이 대단했다. 동성애에 대한 반감과 혼란감을 표현하는 대신 만남을 도왔다. 새봄과 경수 커플을 함께 넣은 이유도 겉으로는 달라 보일지도 모르는 두 사랑이 다를 것 없이 두 사람의 나누는 그냥 평범한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싶다. 쥰과 마사코보다 어린 그리고 나이 많은 서로 다른 세대의 두 인물이 공유하는 이야기와 감정은 같았고 이 또한 영화의 엄청난 매력 중 하나였다.
그렇기에 아주 조용하고 잔잔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가 끝나지 않길 바랐다.
또 울었다. 오랜 기다림 끝과 그 만남의 뒷모습이었을 뿐인데 심장이 쿵쾅거렸고 눈물이 났다. 멜로나 로맨스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유일하게 이런 게 로맨스라면 사랑하고 그리워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들게 한 영화다. 그 그리움마저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내 꿈에 누군가 나온다는 건 그 사람이 나를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 그 말은 맞는 말이었다. 20년 만의 만남에서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보고 또 눈물 흘리는 모습이, 다시 아무런 말 없이 나란히 걷는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 함께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쥰과 윤희는 지금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영화의 마무리도 둘이 다시 만나게 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윤희의 편지에서 '용기를 내고 싶어'라는 말로 아마 둘은 다시 어떠한 방식으로든 만나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사실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고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물었다. "넌 어떤 인물에 이입해서 영화를 봤어?" 그리고 동생은 "당연히 윤희지"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실 나는 새봄에게 가장 눈길이 갔다. 영화를 보는 대부분의 시간 새봄의 마음이 되어 영화를 봤다. 쥰과 마사코의 재회를 확인하고 뒤돌아 하늘을 보며 웃는 새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리고 항상 필름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며 사진을 찍는 새봄에서 소소하게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사람은 영화를 볼 때 자신과 닮은 혹은 지금 자신의 마음을 닮은 인물에 눈길이 가고 마음이 간다고 한다. 새봄에게 마음이 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떤 인물에 눈길이 갔는가?
어머니가 한국인임을 숨기고 살아왔던 쥰. 일본과 한국 그 어디에도 느낄 수 없는 완전한 소속감은 소수자의 슬픔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감독은 한국과 일본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유를 두 국가가 공통적으로 배타적 민족주의 국가. 소수자 혐오, 차별이 일상화된 국가, 남성 중심적인 시스템이 아주 오랫동안 견고하게 확립된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페미니즘 시대정신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영화의 스토리, 배우, 미장센 등 다 나열할 수없이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참 많았지만 아직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쉽게 보여주기 힘든 주제를 선명히 담았다는 것이 마음에 크게 남았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볼 시간에 새로운 영화를 한 번 더 보자고 습관적으로 말하던 내가 두고두고 또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정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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