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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Dec 16. 2019

을의 연애인가, 인질의 생존 전략인가

지금 여기, 한국에 가장 필요한 이론서

   

올해, 한국 여성을 둘러싼 차별적 현실을 묘사했다는 이유로 희대의 금서 취급을 받던 <82년생 김지영>이 영화화되어 개봉되었고 이에 대해 한국의 몇몇 이성애 연인들 간 빚어진 갈등은 가히 상징적이었다. 남자는 여자친구가 ‘그 영화’를 보자고 할까 봐, 여자는 영화를 보자고 하면 남자친구가 싫어할까 봐 걱정했다. 단순히 취향의 차이가 아니었다. 권력의 유무에서 기인한 반응의 차이였다. 남자들은 영화를 보기 싫다고 하면 여자친구가 싫어하거나 자신을 거부할까봐 걱정하지 않았다. 단지 여자친구가 여성에 대한 차별적 현실을 긍정할까 봐, 그리고 그에 도전할까 봐, 페미니스트일까 봐 걱정했을 뿐이다. 여자는 남자의 기분을 살폈고 남자는 자신의 지위를 살폈다.

  

이성애 연인 간 나타나는 여남의 권력 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이었다. 분명 건강하지 않은 관계다. 여성은 남성이 자신을 거부할 것이라는, 더 나아가 자신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불신과 공포심을 체화하고 있었고 남성은 그것을 해소하지 않았다. 이미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건강하지 않은 관계이지만, 만약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그런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을 해소하고 상대방이 자신과 평등한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를 위한 최소한의 출발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는 상대방을 다른 시각으로 보고 있었고 그것은 높낮이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이 그 역시 사랑이라는 명목으로 구실 좋게 포장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기현상을 일상에서 꽤 많이 마주친다. 사랑하는 사이인데 권력의 차이가 보인다. 그런데 사랑이 이어진다. 더 나아가 권력이 사랑을 지탱한다. 폭력의 피해자가 가해자를 감싸고, 편을 들고, 사랑하고, 모든 피해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남성이 가한 여성 폭력의 피해자가 남성을 두둔하고 자기 탓을 할 때 그를 흔히 ‘매 맞는 아내’라고 부른다. 페미니즘은 때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을 '명예 남성' 등의 언어로 분류하고 진정한 의미의 여성이 아니라며 논의에서 배제하기도 한다. 그러나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밝히고자 하는 것이 사회의 모든 부분이 남성 중심적으로 편제되어 있다는 사실이라면, 마찬가지로 사회의 일원인 그들을 제외하는 것은 페미니즘적인 행동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여성의 언어로 다시 이름하는 것이다. 

    

       

이 책은 여성이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을 사랑하는 이유가 스톡홀름 증후군에 기저를 둔다고 주장하며 여남의 유대감을 인질과 인질범의 그것으로 정의함으로써 이 요원한 질문의 대답을 밀도 있게 제시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 은행에서 벌어진 인질극에서 다수의 인질이 인질범에게 긍정적인 유대감을 느낀 심리적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기 시작한 용어로, 저자들은 이러한 현상이 공통적으로 발견된 다른 인질극들을 표본으로 한 연구를 통해 확립된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을 사회적으로 확장하여 피지배 집단과 지배 집단이 인질과 인질범의 심리적 기제로 착취를 지속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남성 중심사회에서는 여성이 이 스톡홀름 증후군의 경험자이자 피해자, 즉 인질의 심리를 습득하게 되어 사회적으로 인질범의 위치에 있는 남성에게 유대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유대감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이론에 의하면 증후군은 인질 혹은 피해자가 경험하는 주관적 생존 위협, 주관적 친절, 고립, 주관적 탈출 불가능성의 네 가지 선행조건을 통해 발생한다. 첫째, 피해자는 가해자로부터 신체적·정신적으로 생존 위협을 받는다. 둘째, 피해자는 가해자의 사소한 친절에 고마워하게 된다(가령, 가해 행위를 멈추면 친절하다고 느낀다). 셋째, 피해자는 고립감을 느끼며 가해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정체화하거나 가해자와의 관계를 유일한 것으로 여긴다. 넷째, 피해자는 가해자에게서 탈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연구 결과 네 가지 조건에서 높은 수준을 보일수록 증후군의 발생 정도도 높았다. 종합하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생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즉, 살아남기 위해 사랑한다.

    
      

    

스톡홀름 한국


 

이 책의 전개에 따라 피해자와 가해자 구도에 여성과 남성을 각각 대입해보자. 놀랍도록 한국 사회의 현재와 일치한다. 실제로 한국 여성은 곳곳에서,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남성 중심사회가 가하는 위협을 느끼며, 남성의 친절만이 고평가되어 여남 연예인을 향한 잣대의 엄격성이 극명하게 차이 나고, 여성이 법적·경제적·사회적으로 낙오되는 시스템은 여성을 고립시키며,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 중심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성과 유대를 형성하지 않으면 생존에 불리하다고 생각하게 되며 생존이라는 1순위의 욕구를 위해 뒷순위의 욕구를 남성의 욕구보다 뒤로 하여 을의 지위로 자신을 끌어내린다.

  

이론에 의하면 한국은 그야말로 스톡홀름 증후군에 중독된 사회다. 선행조건부터 양상, 증후군이 더 잘 발생하는 환경을 특정할 때 한국 사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부합된다. 이는 남성 중심사회인 한국이 동시에 이성애 중심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주기도 하는데, 강요되는 여남 간의 유대는 여성이 남성과 구별되어 뒤로 밀려나게 되는 출발점인 생식 기관에 의한 구분 사이에서 이뤄지고, 그렇게 발생하는 분리와 차별이 가장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는 유대 유형인 이성애는 자연스럽게 남성 중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로 우선되기 때문이다.

 

       

남성과 이성애에 대한 신봉의 정도, 즉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정도가 심해 여성마저 기득권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을 배제하는 곳일수록 이 이론은 유의미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여성의 언어로 상황을 재맥락화한 이론을 통해 여성 자신도 모르는 피해 사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사회에 스톡홀름 증후군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과 여성을 남성 중심사회의 인질 혹은 피해자라고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페미니즘이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뜨거운 논쟁거리가 되고 그러한 움직임을 반페미니즘 진영이 맹렬히 몰아내려고 하는 동안 사각지대에서 배제되고 있는 여성을 곳곳에서 찾아내 페미니즘 논의에 포함하여 여성이라는 집단으로서의 연대를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어떤 여성이 ‘매 맞는 아내’라는 이름으로 어느 진영에도 속하지 못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페미니즘의 목적은 모든 여성을 향하고, 모든 여성에 속한다. 

 

맞고 사는 여자는 가해자에게 유대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욕을 얻어먹지만,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예찬 되고 미화된다. 그러나 찬양할 거면 둘 다 찬양하고, 욕할 거면 둘 다 욕해 마땅하지 않은가? 결국 둘 다 같은 생존 전략이 아니냐는 말이다. (322p)

        

또한, 서두에 언급한 《82년생 김지영》을 둘러싼 이성애 연인들의 갈등 양상에서 확인할 수 있다시피 한국 여성들은 남성이 페미니즘 논의에 반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영화를 보자고 제안하는 등 그에 쉬이 굴복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책은 건강하지 않은 여남 간의 사랑을 인질극으로 명명하는 파격을 감행함으로써 남성에 대한 이성애적 유대감과 여성이자 페미니스트로서의 자아 정체성이 그 어느 때보다 팽팽히 대립하고 이로 인한 혼란을 경험하는 여성들에게 동시에 건강한 사랑의 지표를 제시한다. 책에 의하면 자유를 되찾은 여성의 사랑은 분명 여성과 여성 간의 사랑과 닮아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인질로서의 심리가 동반되는 현재의 이성애적 규범에서 벗어나 폭넓은 사랑의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저자는 스톡홀름 증후군에 중독된 사회를 타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페미니즘 SF 소설과 여성 연대를 제시한다. 남성 및 이성애 중심적 현실에서는 떠올리기 어려운, 혹은 방해받는  여성 간 감정 교류에 대한 상상을 여성의 언어로 확장하자는 의도이다. 이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발현 그 자체인 우리나라 사회에서 한 편의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유이다. 지금의 한국에서의 페미니즘은 온라인을 통해 급속도로 퍼지고 있으며 활발하고 다양한 논쟁과 함께 대중화되고 있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여성의 언어가 자유로이 범람하며 각자의 플랫폼을 매개로 연대한다. 스톡홀름 증후군의 네 가지 선행조건 중 유일하게 객관적 상황에 해당하는 고립 상태, 즉 여성이 연대하지 못하는 상태는 이러한 환경에서 해소될 수 있다. 나머지 세 가지 주관적 선행조건에서도 긍정적인 해소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음은 물론이다.

  

사랑은 두말할 것 없이 소중하고 특별한 감정이다. 그 때문에 여성과 여성을 혐오하는 남성의 이성애적 관계를 말할 때 사랑이라는 감정은 큰 변수가 된다. 말이 안 되는 것도 말이 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놀라운 감정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근본적인 변수, 지금의 사랑이 다른 종류의 사랑을 짓밟음으로써 공고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사랑의 의미와 가장 먼 방식으로 작용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더 이상 침묵 속에 자리할 수 없게 된 이상 우리는 그 껍질을 과감히 벗겨내 속에서 곪고 있는 현실과 직면해야 한다. 아픈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외면하는 동안에도 증상은 계속된다. 증후군으로서의 사랑에 끊임없이 반대하고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가까워져야 한다. 먼 미래일지도 모르지만 그날이 오면 우리는 틀림없이, 더욱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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