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고는 도취보다는 비장미에 가깝다.
근래 JTBC에서 방영하는 여행 예능 프로그램 <트래블러>에서는 세 명의 남자 연예인이 아르헨티나에서 자유여행을 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들은 가장 큰 도심인 부에노스아이레스부터 이구아수 폭포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을 활보하며 아르헨티나의 매력을 시청자에게 소개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다. 그들이 골목을 탐방할 때, 유명한 기념비를 볼 때, 탱고 공연을 볼 때 계속 언급하는 것이 이 영화이며 영화의 장면들이 이 예능 프로그램의 자료화면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해피투게더》는 홍콩 감독이 홍콩 배우들과 함께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출연진들과 함께) 아르헨티나에서 촬영했다. 홍콩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로 세계적인 흥행을 일으킨 왕가위가 아르헨티나를 영화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은 놀라웠다. 왕가위는 자신의 흥행작들의 주연배우였던 장국영과 양조위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떠났고, 이곳에서 또 하나의 걸작을 완성하였다. 그가 활동한 1990년대 당시 그의 영화가 한국 청년들에게 홍콩에 대한 환상을 심어준 것처럼, 《해피투게더》는 우리에게 아르헨티나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게 된다.
영화에서 장국영(보영 役)과 양조위(아휘 役)는 연인으로 등장한다. 영화는 헤어진 연인이 재회한 설정으로 시작하고, 이들은 새출발을 위해 홍콩에서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이 곳에서 그들은 폭포를 보기위해 여행을 떠나지만 성격 차이로 여행 도중에 다시 헤어진다. 아르헨티나 한복판에서 말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에 남아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두 사람은 우연히 다시 만난다. 탱고 바에서의 재회를 시작으로 동거를 시작하나 불신과 오해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위태로워진다.
왕가위 감독 영화 특유의 예술성은 《해피투게더》에서도 나타난다. 10초 이상 지속되는 폭포 장면을 삽입한다거나, 흑백 혹은 유색 필터를 통해 특정 색만을 강조한 영상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다양한 말소리들이 영화를 다채롭게 한다. 물론 이전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전개의 개연성에 대해 불친절한 면들도 충분히 있다. 그러나 이로써 관객이 전개상의 공백을 스스로 채우게 되고 결국 관객은 더욱 능동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각 장면의 예술성을 맞닥뜨릴 수 있고 이로 인해 영화의 전개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 글에서는 내가 발견한 예술적 장치 두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하나는 흑백 영상에 관한 것이다. 영화의 장면들은 컬러와 흑백을 오간다. 실제로 각 장면의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계산하진 않았으나 흑백 장면의 비중들이 전체 영화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느껴질 정도로 흑백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그 외에도 특정 색필터를 이용해 특정 색깔만 강조되도록 만든 장면들이 있다.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감독이 특히 부각하거나 감추려 한 것이 있다고 생각된다.
색을 대체할 때 나타나는 미학적 효과는 이미지에 대한 인상에 영향을 미친다. 일례로 조향 시인의 「에피소드」라는 시에서는 총에 맞은 이미지를 파란색으로 그린다. 총을 맞아 손에 구멍이 뚫렸는데 손바닥의 구멍을 통해 바다가 보이는 이미지이다. 1950년대 대표 시인이었던 조향은 총에 맞았을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피의 이미지, 빨간색을 없애버리고 그 자리에 파란 바다를 두었다. 전쟁의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하고 있던 당시 문단의 분위기에서 이는 획기적이었다. 이렇게 잔인한 색을 지우고 그 자리에 파란 바다를 두어서 전쟁과 무기로부터 태연한 스스로의 작품 세계가 되었다. 조향 시인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는 나름의 방식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서, 《해피투게더》에서 흑백으로 처리된 장면들을 생각해보자. 이런 장면들이 흑백으로 그려진 것은 자극적인 이미지를 가려주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남자가 성관계를 가지는 장면, 어디선가 얻어맞고 와서 피를 흘리는 장면, 그리고 화가 나서 유리병을 집어던지는 장면 등이 흑백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자연들 모두 자극적인 색을 가지고 있다. 나체의 색, 피의 색, 유리파편의 반짝임은 모두 선정성이나 폭력성을 담고 있다. 이러한 장면들이 흑백으로 처리될 때, 관객은 자극적인 이미지에 휘말리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인물 간의 감정이나 장면이 가진 극적인 의미에 대해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전반에는 탱고의 춤과 음악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양조위가 탱고바에서 직원으로 일한 탓에 탱고 음악과 춤들이 영화에 처음 나타나며, 두 사람이 재회했을 때, 그들은 방에서 같이 탱고를 연습하기도 한다. 영화의 주인공들, 그리고 주인공이 아닌 아르헨티나 현지의 출연진들이 탱고를 추는 장면이 영화 중간중간에 삽입된다. 이 장면들은 중요한 극적 전개의 사이에 삽입되어 인물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한다.
왕가위의 영화에서 댄스와 댄스음악은 흔히 등장하는 소재다. 《아비정전》에서는 장국영이 음악을 틀어놓고 거울 앞에서 혼자 맘보를 추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중경삼림》에서는 (댄스까지는 아니지만) 왕페이가 음악에 몸을 맡긴 채로 양조위의 집에서 그의 전애인의 흔적들을 치운다.
감독의 다른 영화들에 등장하는 댄스의 요소들과 《해피투게더》의 탱고를 비교해보면 상당히 흥미롭다. 《아비정전》과 《중경삼림》에서 나타나는 댄스는 도취적이다. 특히 《아비정전》에서 장국영의 맘보춤은 상당히 묘하다. 전날 밤 애인과의 분란 뒤 맞이한 아침, 그는 음악에 맞춰 맘보를 춘다. 특히 흐느적거리는 맘보는 모든 관계로부터 초연한 그의 모습을, 혹은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춤에 도취한 모습을 보인다. 이 장면은 훗날 한국의 다른 영화들에서도 오마주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해피투게더》에서의 탱고는 도취보다는 비장미에 가깝다. 탱고를 추는 인물들은 절대 대충 추지 않는다. 주인공의 탱고 장면은 극의 가장 슬픈 지점에 삽입되어 비장한 눈빛으로 진행된다. 특히 양조위가 추는 최후의 탱고는 장국영과의 이별을 연상시킨다. 이 한 장면은 그 전에 두 사람이 허름한 자취방에서 함께 탱고를 연습하던 장면을 연상시킨다. 둘이 함께 춤을 완성시켰지만, 결국에 탱고를 출 때는 함께 있을 수 없음에서 영화가 비로소 완성된다.
글 - 아트인사이트 에디터 한승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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