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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인사이트 Mar 18. 2020

차별 받는 당사자도 차별하는 주체가 된다.

 


 

숙명여대 법학과에 합격한 A씨는 입학을 포기했다. A씨는 트랜스젠더(MTF)다. 태국에서 성전환수술을 받은 A씨는 법원에서도 여성으로 호명됐다. 입학 사실이 알려지자 신입생과, 재학생, 래디컬 페미니즘 동아리 등에서 A씨의 입학을 반대하는 여론이 일었다. 6개 여대의 23개 페미니즘 단체는 입학 반대를 주장하는 요지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여론은 확대됐다.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 성명서는 성별을 고정 불변의 정체성으로 간주한다. A씨를 “여자라고 주장하는 남자”라고 지칭하며 A씨의 입학이 “여자들의 공간을 침범하고 빼앗아 갈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여대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마련된 공간이다. A씨의 입학은 그래서 허용할 수 없다. 스스로 여자라고 선언하는 남성의 침입까지 정당화할 근거로 남을 거다. 숙명여대는 지난해 3월 마약을 소지한 남성이 여자화장실에서 발각된 일이 있었다. 6월엔 여장남성이 캠퍼스를 활보하며 경찰에 체포된 적 있다. A씨의 입학 반대 성명엔 정당한 기본권 요구라는 의식이 깔려있다. 특정 집단에 대한 차별의식의 발로가 아니라는 맥락이다.


2017년 서울시교육청은 강서구 폐교부지에 장애인학교(서진학교)를 설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인근 거주민들의 반대가 격렬했다. 대안 모색을 위한 주민토론회에서 장애학생의 부모는 무릎 꿇고 “장애아들에게도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호소하지만 주민들은 “쇼하지마!”라고 응수한다. “장애인은 한군데 몰아넣어야 한다.”, “장애인이 많으면 무섭다.”는 발언이 이어졌다. 장애인학교의 설립이 지금의 안전한 일상을 해칠 거라는 맥락이 거주민들의 발언에 내포돼 있었다. 주민들이 학교 설립에 반대하는 이유는 장애인을 자기 시야에 보이고 싶지 않아서다. 다시 말해 장애인이 무섭고 싫어서다.


혐오는 두려움과 엄연히 다른 감정이다. 그러나 혐오감정의 기저엔 언제나 공포가 있었다. 남성의 게이 혐오는 동성에게 강간당하는 공포와 무관하지 않다. 유대인 혐오는 유대인이 질병을 옮기는 인종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시작됐다. 흑인 혐오는 흑인 노예가 백인 농장주의 부인과 딸을 강간할 거라는 두려움에서 기인했다.(천관율, <혐오란 무엇인가>, 시사인, 20.02.25)


혐오는 차별과 박탈로 이어진다. 강서구 서진학교는 시공을 시작했는데 주민들의 반대민원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정확한 개교일정을 가늠할 수 없다. 반대논거는 여전하다. “장애인이 무섭다. 싫다.” 서진학교의 사례는 다수집단이 소수집단의 권리를 박탈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적 위신을 가진 특정한 지위만이 권력을 행사하는 게 아니다. 싫다고, 무섭다고 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권력이다. 장애인의 교육받을 권리는 다수집단의 ‘싫다’는 언어에 매몰됐다. 그들의 권력에 의해 배제됐다. 문제는 차별하고 박탈하는 주체가 그것이 차별과 박탈이라는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한다는 거다. 강서구 주민들은 자신들이 누군가의 권리를 침해했을지도 모른다고 성찰하지 않았다. 이 공간과 일상을 지켰다고 안도했다.


차별의식과 혐오가 아니라고 했지만 A씨에겐 날선 언어들이 격발됐다. 누군가는 A씨를 내시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비둘기가 되고 싶어 뒤뚱뒤뚱 걸으려는 인간”이라고 말했다. 성별정정 자체를 규제해야 한다는 국민청원이 시작됐다. 규모는 점점 불어났다. A씨의 입학을 거부하는 이들에게서 강서구 지역주민들이 보인다. 그 때의 풍경과 정확히 일치한다.


미국 웰슬리대학의 페기 매킨토시 교수는 특권에 대해 말한다.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느낌”이 특권이다. 특권은 인식하기 어렵다. 나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일상적이고 당연하게 체감되는 조건이자 경험이어서다.


개인에겐 하나의 지위만 있지 않다. 사람은 성별, 국적, 성정체성, 종교 등 수많은 다중적 지위의 산물이고 때문에 특권이 발동되는 것도 제각각이다. 당신과 나는 어느 때엔 약자로써 배척당하고 어느 때엔 스스로의 느낌을 그대로 토로하며 특권을 누리는 일이 있었다. 숙명여대에서 A씨에게 특권이 있었는가. A씨가 “나를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안전하다고 느끼며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감각했을까. A씨와 입학반대를 주장하는 이들 중에 누가 더 힘 있는 지위로 보는 것이 타당한가. 여대라는 공간에서 특권을 누리는 주류집단은 여성들이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쓴 김지혜 교수는 시기와 공간, 지위에 따라 위계가 변화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차별받는 소수자 역시도 차별의 주체가 되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 “(지위의) 다중성을 생각해야 비로소 내가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차별을 할 수도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는다고 해서 모든 측면에서 약자인 것은 아니다...(중략)... 차별은 두 집단을 비교하는 이분법으로 보이지만, 그 이분법을을 여러 차원에서 중첩시켜 입체적으로 보아야 차별의 현실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다.”(김지혜, <선량한 차별주의자>, p58, 창비)


내 안전을 위해 타인을 배제해도 되는가. 그건 내 일상을 보존하는 행위가 아니다. 스스로를 검열하고 성찰하지 않는 언어야말로 혐오의 언어다. 내가 특권을 누리는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떠올려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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