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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큐 Jun 01. 2021

미운오리새끼

       제목: 미운오래새끼 큐레이터


                                                2021년 5월 21일 작성 손정화


<11장 미운오리새끼의 탄생>

1976년 대구시 비산동. 원대동. 평리동.어렸을 때 이사다니던 나의 동네 이름들이다. 나는 이쁘게 생긴 딸 그다음 아들을 바라고 바라다, 한번은 미끄러지고 두 번째 낳아진 미운둘째딸이었다. 그다지 축하받은 기억이 없으며, 나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그저, 아들을 낳기위해 엄마 아빠가 싸우기도하고, 나의 6살쯤에, 아들을 낳지못한다면 두분은 이혼해야한다는 소리를 흘려듣기도했다. 정말 간절한 기원이 통했을까? 엄마는 떡뚜꺼비같은 아들을 놓고야말핬다. 해냈다. 우리 막둥이 귀염둥이 귀동이 아들 내남동생은 그야말로 엄마의 보물이었다. 아빠는 3층 집계단을 두칸씩 올랐다. 퇴근하고 계단을 성큼성큼 뛰어올라가 아들을 보려고 한숨에 달려왔다. 그렇게 간난아기는 귀엽게 사랑받으며 무럭무럭자랐다. 


소박하고 가난했던 아버지는 매일매일 입에 풀칠해야하는 하루하루의 투쟁 속에서, 그다지 체력이 좋지않았던 엄마는 맞벌이를 해내지못했다. 나의 기억에는 늘 누워있거나 낮잠을 자기도하고, 어린나에게 설거지를 시키곤했다. 나는 참다 참다

“엄마는 왜 언니한테는 설거지 안시키노?”왜?!하고 울분을 터트리기도했다. 우리집 첫째는 이쁘고 인기도 많았다. 집에서 가만히 설거지 따위를 하는 어린이가 아니었다. 나가서 친구들과 어울리기 바빴고 동네 공주님이었다. 나는 그에 비해 인기도 없었고 친구도 딱히 없어서 갈곳도 없었기 때문에 누워자고있는 엄마의 뱃속에 살을 붙이고 누워있기를 좋아했다. 그러니 당연히 게으르게 누워있길 좋아했던 엄마의 심부름이 내몫일 수밖에 없었다. 어짜ᅠ갈 수 없는 삶의 이치였다. 나는 그런엄마가 싫지 않았다. 꾸지람듣고 혼나고 약간 서러운 나의 삶이었지만 그래도 엄마의 뱃속을 붙이고 앉아있는 것은 늘 고프고 고픈 사랑이었다. 


<귀염둥이 막내>

시간이 지나도 그날의 낮잠의 기억은 에피소드로 남아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엄마는 낮잠을 자고 구들목에서 나도 그옆에서 잠이들었는데 잠시 눈을 떠보니 갓난쟁이 내 남자동생 훈이 아가가 혼자 잠에깨서 자기가 싼 똥들을 바닥에서 만지고 가지고 놀고 주워먹고 있는게 아닌가!? 어머나 에구머니나...나는 엄마랑 화들짝 놀라 “어머나 세상에! 똥독 오를라!”하면서 언능 아기를 똥뱉게 하고 씻기고 했던 기억이 난다. 우리들의 나른한 일상이었으며, 회상하면 웃음이 나는 아기와 똥의 일화였다. 또 어느 날은 즉석사진기가 일시적으로 생겨 사진을 찍으려 아기를 엄마 배옆에 앉히고 나와 이웃집 여동생과 포즈를 잡고 있는데 귀염둥이 막내 훈이가 그만 사진기를 향해 쉬~를 하고 말았다. 깔깔깔 웃으며~.  따뜻한 추억이 사진과 함께 남아있다. 아가는 무럭무럭 자라서 내가 데리고 지금의 달고나, 대구사투리로는 ‘국자’라고 했다. 국화빵도 사먹고, 납작만두도 사먹고, 500원 용돈을 받으면, 오락실로 곧장 달려가서 5살이 된 훈이와 갤러그도 하고 보글보글도 하고 너구리도하고 그렇게 나의 유년시절은 흘러갔다. 훗날에도 이날은 왜그리 생생하게 기억이나는지 너무 재미있었나보다. 40년이 지나 서울종로구 익선동에서 다시 만난 오락실 보글보글을 접하고 소리지르면서 재미나게 게임을 즐기기도 해본다. 40년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 그때의 즐거움을 회상하면서. 



<천덕꾸러기 미운오리새끼의 추억>

언니는 똘망똘망하게 이쁘게 태어났고 그 당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는 하나만 낳아 잘살자 또는 둘 만 낳아 잘살자라는 슬로건이 붙어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딸딸, 두 번째 딸로 결코 사랑받을 수 없는 구조였는지 엄마는 나를 남장을 하고 데리고 다녔다. 이쁘게 드레스 입힌 언니의 리본블라우스와 대조적으로 나는 멜빵바지를 하고 머리를 빡빡 깍힌 채, 입이 앞으로 나와있는 사진을 보고 훗날 엉엉 운 적 이있었다. 자라면서 나는 그 사진이 영 서러웠다. 왜 나는 그래야했냐고 엄마한테 따져도 이미 무심코 지나가버린 그 시절의 과거의 추억이라 어쩔 수 없기도 했고 둘째의 투정에 신경쓸만큼 엄마는 여유있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느날에는 

시장에서 참외를 사서 비닐에 담아서 엄마랑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길, 달콤한 참외가 너무 맛있어서, 둘째인 내가 삼형제를 재치고 엄마가 나를 데려가 주어서 기뻐서, 그냥 그날 기분이 좋아서 나는 참외를 마구 신나게 들고 휘둘렀다. 휘휘~~`몇바퀴 돌리자 참외가 숭하고 공중으로 날아가 비닐은 터져버렸다. 나는 무서운 엄마에게 호되게 혼이 났다. 초등학교 1학년인가 가물가물한 기억에 그 혼구녕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비닐안에 들어있는 참외보다도 가볍게 느껴졌다. 엄마를 보고 있으면 늘 무섭고, 정이 그립고, 조금은 안기고 싶은데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듯한 천덕꾸러기 나자신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신세가 짜증이나서, 집안일 설거지 하기싫다고 몸부림치고 땡깡부리는 날에는 이불 뒤집어쓰고 얻어맞기도했다. 지금에야 가정폭력 어쩌고 하는 것이 마치 아이에게 궁둥짝이라도 때릴라 치면 큰일나는 것처럼 하지만, 그때는 그냥 그럴수도있는.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엄마의 스트레스 푸는 방법이기도 햇는지 나느 가끔 그렇게 내 처지가 참 서럽다 생각하지만 별 도리가 없던 7-80년 둘째 그 자체였다.   


-중략-


<포스트코로나 뉴노멀을 꿈꾸며>

 <저평가 우량주 큐레이터의 콘템포러리 다이얼로그인>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 2년째. 포스트 코로나와 뉴노멀을 바라고 갈망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 코로나 이전의 시대로는 돌아갈 수 없음을 느끼고 자각하면서 잊어버린 것 잃어버린 것 상실한 것 상처받은것들의 투성이들인 지금의 시대를 도시의 여자들은 때로는 스타벅스에서 수다를 떨면서, 때로는 치열하게 운동을 하면서 상처와 아픔과 스트레스를 뛰어넘으려 어떤이는 발버둥치고 또 어떤이는 다 내려놓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 보내고 있다. 별다방은 오지게 시끄럽고, 필자는 그래도 이곳을 벗어나지못한다. 긴장과 이완의 경계선 같아서...

다양한 컨텐츠를 기획할 수 있고 어쩌면 포기하지 않고 있으면, 이런 바이러스를 저항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저항한 사람이 면역력으로 살아남듯이, 또다른 기회가 주어지지않을까, 안되고있는 시간들을 위로해보면서 다음 스텝을 위해 부던히 애써보는 지금 시간이다.




<내직업의 원점_꿈꾸는 큐레이터의 회상>: 노랑 모자미술화구통국화명태

노란모자를 쓴 초등학생.

미술화구통은 꽤 비싼 물건이었다.

초등2학년의 눈에도, 빈부의 격차는 느껴졌으며,

원목으로 된 나무 화구통을 들고다니는 여자아이들은 브루주아같았고, 꽤재재한 나는 한없이 의기소침했다. 

그래도, 소극적인 나는 그림을 그려서 그나마 수상을 하고 이름이 호명되는 재미에 그림그리는 재능을 인정받았던 그 순간을 다시 돌리고 또 더 해가고싶어, 엄마의 허락도 없이 그냥 나도 미술관에 들어가고싶다. 그냥 들어갔던 초등3학년이었다. 

화선지와, 붓과, 먹통, 깔개도 사야했는데 그모든 것이 나는 부담스러웠다. 

제일 싼 것, 그당시에는 500원정도면 먹통을 살수있었는데, 그것도 집안사정생각해서 가장 묶음으로 싼 것을 선택하고, 미술선생님이 공구를 하자고 하는 부분은 최대한 쥐어짜내어 겨우겨우 가까스로 단체 미술 방과후 활동을 참여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동양화, 한국화반이었고 미술담임선생님 전공이 한국화였었던 것 같다. 나는 사교육을 받지 못했으나 꽤 그나마 파도 그리고, 국화도 그리고 가끔은 명태도 도전해보았던, 작은 지방학교 초등미술반에서 한 2인자 정도는 하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가장 잘 그리던 H는 성격도 꼼꼼하고 그당시 반장이었으며 엄마가 늘 맛있는 빨간 고추장볶아진 진미채 반찬을 해주어서 내가 늘 부러워하던 아이었다. 머리도 이쁘게 양갈래로 땋아 다녔으며 스타킹도 구멍이 나지않고 늘 깨긋한 옷매무새를 자랑해서 남자아이들에게도 인기가 꽤있던 친구였다.

훗날 우리는 대학도 같이 다녔는데 H는 법대로 나는 일문과로 가서, 결국 나는 큐레이터로 좋아하는 미술을 실컷 보는 직업으로 전향하였는데, 그림잘 그리던 그녀는 결국 법관련 직업을 하면서 보냈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도 삶이 평탄하진 않았던 것 같다. 재능이있었다. 글도 그림도....재능있는 여자 좀 박복한가? 나에게 물어보면서 한때 혼자 생각해 본적있다.

프리다칼로는 재능이있었지만 너무 아픈 인생을 살았었는데....나는 그정도까진 가고싶지 않았다 과거에도 앞으로도. 그냥 소소하게 즐거운 일상의 만족을 즐기며 살아가고싶다.



 <봉급쟁이 큐레이터와 꿈을 향한 문화컨텐츠 제작자의 삶

20201년에 46세의 큐레이터로 20대가 받는 봉급을 부여잡으려 그렇게 고단하게 석사를 하고, 아카데미를 다니고, 국가면허 시험을 치고, 지방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북경으로 이리뛰고 저리뛰었나? 하면서도, 그래도 삶을 돌아보면, 나름 세상구경을 많이 한 것 같아, 커피한잔에 잔시름은 달래보고, 이나이에도 꿈을 꾸며, 아팠던 지난해를 회상해보고 곱씹어보지만 결국 나를 숨쉬게 해주었던 것은 가장 아팠던 사건도 감사를 해보는 내적혁명이었지 싶다.


<우리엄마>

내엄마는.....지금의 내나이쯤 돌아가셨다.

간암투병 끝에...거의 4년간 누워서 투병을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내 엄마이다...더 할말이없다.

 

 

<고독에 대하여>

고독은 정말 좋은거다

진짜 외롭게 고독하게 싸우지 않으면 자기자신에게 집중할 수가 없기 때문에

나는 지금 고독한 덕분에 매우 즐겁게 일을 집중할 수가 있다.

 

<사랑은>

지금이다.

 

<아무렇지도 않은척 >

아무렇지도 않은척 꾸역꾸역 밥먹고 키피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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