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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지협 Jan 14. 2024

찬바람에서 찾아낸 시간과 기억의 오차범위


찬바람이 발가락을 얼음장으로 순식간에 만들어 버리는 계절이 왔다. 


오늘 걸음 수 300도 안 될 정도로 의자와 한 몸이 되어 보내는 중이지만 그다지 뭔가 해낸 건 없다. 생각으로나 마음으론 벌써 수만 가지를 해냈을 거였으나  뭘 했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순삭이 된 원인 중 3가지는 핸드폰 사진정리. 그리고 검색하다 샛길로 빠져서 한 동안 딴짓하는 경우. 그리고 집안일 이렇지만... 크게 문제 될 일은 없긴 하다. 


결혼 2년 차였던 21년도에 임신을 고려하기 시작하고 병원을 찾아가 봤고 작은 노력들을 해봤지만 이미 마음으로 셔터문을 내려버린 게 아닐지 모르겠다. 생리를 해야 할 시기에 한두 번 빼먹을 정도였으니... 아마도 엄마가 될 생각이 없다는 게 몸에서부터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올해는 할머니가 갑자기 크게 아프시기 시작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힘든 감정의 고비들이 있었다.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로만 본다면 엄청난 시련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겐 할머니에게 일어나는 모든 변화가 내겐 충격이었다. 


어린 시절 내가 철없이 굴었던 건,


이렇게 할머니가 나이 들어 병들고 아픈 상태가 될지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 눈앞에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할머니는 항상 엄격했고 무서웠고 기강 잡는 그런 '어른'이었다. 매우 양심적이었고 지혜로웠던 할머니. 할머니의 강인함에 나는 숨죽여 지내는 건 당연지사였으나 할 말은 하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던 나로선 사춘기가 아마도 소심한 주장의 시절이었달까... 다만 어른들과 보내야만 했던 내겐 내 편이 없었다. 


그래서 부당하다고만 생각했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아닌 [무조건]은 어렵지만 해야만 하는 생존법칙과 같은 것.


시간이 지나고 보면 어렵고 힘들게
보냈던 시절이 모두 아름다웠고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여겨진다고 했다



어쩌면 사람이 가진 기억의 가장 좋은 점이 아닐까? 힘들고 고통스럽던 시간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면 얼마나 살아가는 게 괴로울까... 


지금이나마 그나마 임신을 위한 검사를 할 때의 고통이 잠시 잊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악몽 같은 임신준비는 하고 싶지 않은 마음뿐이다. 



카톡을 통해 우연히 보게 되는 연락 안 하는 지인들의 만삭사진은 내게 부러움의 대상이고, 한때 아이를 키우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초등학교 교사가 한때 꿈이었던 나였기에 아이를 치가 떨리도록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나, 노력 그 이상으로 본성이 엄마가 되길 거부한다면... 이건 나로서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싶다. 행복하지 않아도 억지로, 당연히 다들 사는 것처럼 살아가야만 하는 걸까?


할머니와 보냈던 그 시간은 그냥, 내 삶의 일부였다. 할머니와 보냈던 어린 시절이 마냥 행복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미화된 기억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 시간이 아주 많이 소중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생이 모두 즐겁고 재밌고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니지 않은가? 


다만... 할머니가 보지 못한, 느끼지 못한, 누리지 못한, 알지 못한, 세상의 아름답고 신기하고 즐거운 것들을 조금 젊으실 때 건강하실 때 함께하지 못한 게 너무 마음이 아프다.


몸이 아파서 먹는 것도 줄에 의지해서 겨우 먹어야 하고 배변활동도 수시로 간병인의 손을 통해 관리되어야 하는 이런 상황은 상상만 해도 괴로우나 그래도.


그래도. 할머니가 살아 계신 게,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한다. 일주일에 30분 정도 보는 게 전부지만 할머니와 눈 마주칠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살아 있어 줘서 고맙다고.


바람이 차갑다. 그리고 이제 곧 겨울이고 연말이 올 테지. 시간 참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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