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만 먹었지 아직은
시간개념이 매우 철저한 아버지. 아버지의 칼 같은 시간개념 덕분에 할머니는 엄청난 속도로 빠르게 준비하는 걸 습관화하셨다.
"너희 아빠, 가자하면 나가야 하는 거... 알제?"
할머니의 그 말은 나를 이해시키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손발이 매우 느린 편에 속하는 나는... 아무리 습관화를 들여도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내가 터득한 방법은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만한 아주 단순한 행위 두 가지를 동시에 하는 것. 그리고 당장 급한 게 아니면 포기하고 뒤로 미루는 것.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지 않는 경우에는 지체 없이 바로 응징이 눈앞에 펼쳐져서, 발등에 불 떨어진 듯 달리고 진땀을 흘리게 됐고, 누군가의 시간을 빼앗는 무례와 보이지 않는 신뢰를 깨뜨리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를 모르는 미련 때문에 한두 번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인간관계에서 들통난 시간개념은 일할 때도 어김없이 제 멋대로 늘어지곤 했는데, 열받고 쭈우욱~ 늘어나는 모차렐라 치즈처럼 아주 진득하게 자리에 앉아 시간을 펑펑 낭비하는 게 당연한 일상이 됐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진심이었기에 실수는 할지언정 대충은 없었다.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못 본 척 지나치지 못했던 과거의 나. 나에게 지금은 말해주고 싶다. 꼭 그럴 필요는 없다고 용쓰고 애쓰고 그러면 내게 남는 건 뭣도 없더라고 말이다.
그땐 몰랐었다. 몸도 마음이 지쳐가고 있던 그때 그 시절의 나는 청춘이 언제까지나 이어질 거라 여겼고, 언제나 곁에 할머니와 가족들이 건강한 모습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만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단지 내게 주어진 시간을 내일의 일을 위해 내가 조금 양보하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일만 붙잡고 있었다.
공들이고 다듬었던 작업물. 상사에게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던 결과. 무엇보다 보상 같은 건 바랄 수도 주어지지 않는 일인 줄 알면서도 단지 하고 싶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이유로 돈도 인정도 바란 적 없이 무작정 달렸었다. 결국 내겐 아무것도 남지 않는 혼자만의 헛된 노력이었다는 사실과 독대하게 되자, 허무함만 남았다.
일을 순수하게 대했던 내 마음을 의심하다.
과연 내가 어떤 마음으로 대했던 건지. 다시 생각해 보게 됐고, 이후 이직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됐는데... 그게 정답일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비유컨대, 단지 첫사랑에 대한 실패 이후에는 사랑을 쉽게 하지 못하고 조심하게 대하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불태워서 사랑했던 일이 하루아침에 나 몰라라 배신하는 상황에서 내가 다시 그토록 사랑에 빠질 수 있을지, 어떤 마음으로 어떤 태도로 다시 일을 대해야 할 지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시간이 내게 찾아왔었다.
그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제일 큰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그저 그렇게 받아들이며 살아가면 좋겠으나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이미 나의 두 배의 열정에 비례하는 시간개념에서부터 깨닫게 됐다. 이후 쉽지 않았다 끝도 시작도...
단지, '나 이렇게 살다가는 까닥하면 골로 가겠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지나가는 시간이 벌써 사십 대를 바라보기 시작했고, 나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한정됐다. 이모, 아줌마. 사회적 위치에서 설 수 있는 자리와 기회는 줄어들고, 할 수 있는 건 없다는 것. 무엇보다 자신이 없었다. 뭣 하나 제대로 멋지게 해낼 수 있다고 보여주고 싶은데. 그게 내게 있기나 한 건지. 아직도 모르겠달까. 산 송장도 아니고, 것 참.
계속 미루고, 안 하고, 무서워하고, 물러서 있으면, 시간이 봐줄 것 같지?
아니. 안 그렇더라. 오히려 내가 나를 재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걸.
가장 쉬운 것부터, 아님 최소한으로 피해봐도 다시 시작 가능하겠다는 것부터 공략해 보는 게... 몇 년 뒤에도 지금과 똑같이 이렇게 고민하고 있을 거면 차라리 지금 해보고 포기하고 과감 없이 버리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실패할까 봐,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어차피 안될 텐데 이런 생각으로 미뤄왔던 걸 해보려 한다.
나라에서도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나이, 불혹이다. 정말 자칫하면 골로 간다.
평생 못 해 볼 경험
두 번 다신 해 볼 수 있을지 모를 곳들
언제 끝날 지 모를 나의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
그게 당신에게도 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