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는 온몸으로 그걸 표현했었다
나와 할머니는 삼십 년 가까이를 서로의 곁에서 머물렀다. 특별한 일이 없고는 거의 서로에게 있어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으니 서로에 대해 거의 모르는 게 없을 정도랄까...
내겐 사춘기를 지나 대학시절에 약간의 비밀들을 만들었지만, 어쩌면 할머니의 눈치 단수가 꽤 높은 걸로 기억하건대 이미 알거나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해주셨던 것 같다.
크게 변수가 있을 일은 전혀 생기지 않도록 할머니는 항상 나를 주시하고 있었고 늘 보디가드처럼 대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할머니만 내 곁에 있으면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던 그때 그 시절.
할머니는 나의 이유가 됐고, 방패이자 방어막이었고, 울타리였다. 가끔은 엄격하고 단단해 보이는 담이 답답할 때도 있어 뛰어넘으려 들곤 했는데... 돌아오는 건 나를 향해 쏟아지는 애정 어린 잔소리였다. 우린 어쩌면 서로를 아끼는 마음에 가장 가까운 애증의 관계로 진화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30살이 될 무렵 나는 할머니의 곁을 떠나기로 마음먹게 됐다. 집에서도 시집갈 나이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고 이젠 독립해도 무방한 그런 나이겠거니 싶었다. 이성적으론 이미 이해했고, 결혼이라는 걸 해야 할 나이라고 여겼다. 객관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나 마음이 따뜻해 보였던 남자를 만나게 됐고 결혼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고서 '결혼'을 덜컥하게 됐다.
임신은 덜컥하는 경우가 있어도 결혼을 덜컥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 걸로 알지만, 나 같은 경우는 달랐다. 결혼 이후의 삶은 생각보다 매우 심오했고, 때론 가벼운 브런치 같은 연애의 연장선 같아서 좋았다. 그 와중에 가장 마음에 걸렸던 건 할머니와의 이별이었다. 거리가 많이 멀어졌다. 벌써 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할머니의 입장을 헤아려보니, 할머니는 적잖이 큰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할머니의 외로움과 고독을 그 누구보다 곁에서 봤고 지켜왔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할머니가 씩씩하게 잘 견뎌낼 거라고만 여겼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왜냐하면 할머니는 내게 그런 내색을 비춘 적이 없었으니까.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린 것도, 초기 치매 증세를 겪은 것도, 불안 증세가 있었던 것도 모두 내 탓만 같았다... 왠지 할머니가 이렇게 뇌출혈에 뇌경색이 오기까지 나는 왜 몰랐나 싶고, 나와 더 오래 함께 했더라면 이런 일은 좀 더 늦게, 아님 안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할머니는 재작년부터 계속 하나씩 내가 할머니를 찾아올 때마다 선물을 사다뒀다며 오면 챙겨다 줬다. 나는 매번 매정한 손녀역할로 "할머니~ 뭘 이렇게 비싼 걸 샀대. 이런 거 없어도 되니까. 제발 이런 거 사지 말고, 할머니 갖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거 사 먹어요~ 알겠죠?!" 나를 생각하며 고심하며 골라 아껴둔 큰돈을 큰맘 먹고 썼을 할머니의 애정 어린 마음을 나는 그렇게 무심히 지나쳐버린 것만 같아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왜 그랬을까...
그냥, "잘 쓸게요. 고마워요 할머니! " 그 말이 뭐 그렇게 어려운 말이라고... 할머니는 언제 어디서든 나를 도와줄 사람이었다. 항상 졸졸졸 따라다니며 내가 난처하거나 힘들거나 어려워할 때마다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나 하나씩 도와주던 그런 우렁각시 같은 존재. 그런 소중한 사람이 세상에 사라진 것 같아 마음 한편이 매우 허전하다. 그래도 아기같이 보살펴줄 존재로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고, 그렇게 마음을 다독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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