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실에 TV를 두기 싫다 주의지만 그렇다고 TV와 완전히 이별할 만큼 아주 매몰찬 인간은 아니므로 얼마 전 자리를 크게 차지하는 대신 이동식으로 구석에 짱박았다 꺼냈다 할 수있는 스탠바이미를 구입했다.
사실 이전집에서 거실전면에 TV가 있어도 거의 공중파를 보는 일은 없고 각종 OTT만 이용했었다. 공중파를 볼 수는 있지만 라인을 연결해야 하는 굉장히 귀찮은 작업이 있으므로 이제 나는 진정으로 더욱더 OTT 콘텐츠만 보게 되는데 얼마 전 소파에 누워 리모컨으로 톡톡톡 넷플릭스를 넘기다 너의 시간 속으로 라는 드라마를 보았다.
30대 이후 이런 종류의 연애물은 대부분 노인에게 공감이 너무나 안되므로 어떤 작품이 화제가 되어 한번 시작해 볼까 싶다가도 2화로 넘어가질 못했다.
나에게 있어 그간 공감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주인공 나이가 10-20대 풋풋한 남녀의 사랑이야기라면 일단 아웃.
또는 나이와 상관없이 여주인공이 남주인공에게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야! 너어어~??!" 하며 이상하고 어설픈 푼수 같은 캐릭터일 때 바로 아웃. (너의 시간 속으로도 이점에서 조금 위험하긴 했다.)
아니면 두 남녀가 서로 첫 만남부터는 앙숙관계였지만 티격태격하며 사랑을 느끼게 되는 그런 비슷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아웃이다. 왠지 모르게 손발이 오글거리고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나의 시간이 마구 낭비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남자든 여자든 주인공이 맘에 안 들면 일단 바로 아웃이다.
여하튼 너의 시간 속으로와 같은 허무맹랑한 내용과 설정은 평소의 나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법 한데 이상하게 이번엔 며칠을 연이어 보고 두근두근하며 끝장을 냈다. 시간이 많아 저서 그런지 그런 판타지연애물에 빠지고 싶은 헛헛함이 내면에 있었던 건지 알 수 없지만 마치 중학교시절 수많은 만화책들을 매일 섭렵하던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그들의 배경이 딱 그 당시 내 나이대의 감성, 삐삐, 카세트, 워크맨, 만화책, 그리고 드라마 내내 흐르는 서지원의 노래 등등 너무도 익숙했던 것이어서였을까. 그런 이유에서인지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내 마음이 말랑말랑해지고 옛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에 비해 드라마가 끝난 후 너의 시간 속으로 에 등장하는 남자 주인공 안효섭배우에 대해 마구 서칭을 하거나 너무 멋있어!로 이어지진 않았다. 정말 딱 그 드라마 내용과 배경에만 집중한 듯하다.
또한 드라마의 원작이라는 다른 버전의 상견니를 다시 찾아보거나 할 생각도 1도 없었다. (어차피 거기엔 너의 시간 속으로 에서 표현한 그 시대 그 감성이 없을 것 같아서. ) 다만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 앞서 언급했듯이 나의 중학시절을 떠올리게 해서 잠시 상념에 빠져보았다. (요즘의 나는 시간이 많아서 자꾸만 과거일을 회상하게 된다. 사람이 이래서 놀면 생산적일 수가 없는데..)
너의 시간 속으로 가 아닌 나의 10대의 시간, 25여 년 전의 그 시간 속으로.
매일 만화책만 읽다 하루가 끝나던 그 시절. 하교 후 나는 거의 매일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듯한 책대여점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만화책을 빌려댔다. 만화책 한 권에 300원. 소설책 한 권엔 700원. 거의 용돈의 절반이상을 만화 빌리는데 쓰지 않았을까 싶다. 주로 빠져있던 분야는 당연히 순정만화. 판타지연애물이었다. 지금까지도 내 만화인생에서 최고 걸작이라 판단되는 건 바사라이다. 전권을 구매해서 도대체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는지 대사를 다 외울 지경이었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두근두근! 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만화책을 읽고 다음날 아침 좀비가 되어 학교에 가는 날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서지원 테이프를 보니 또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했다. 좋아하던 노래를 너무 많이 들어 테이프가 늘어진 경험을 누구나 한 번씩은 했을까. 지금 와서 기억에 남는 건 당시 영화 타이타닉에 너무 큰 충격을 받고 강남역 타워레코드에서 타이타닉 CD를 사들고 듣고 듣고 또 들었던 기억. 물론 club HOT로서 관련 앨범과 잡지들을 전부 섭렵했던 건 말할 필요도 없지만.
많은 비중을 차지하진 않았지만 드라마에 등장하는 삐삐 역시 정말 추억의 아이템이다. 매일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듣고. 지금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오그라드는 행위인가? 전화기를 들고 혼자 연기하는 것처럼 신나서 나불대다 끊는 거라니.
그때 당시 지금으로 따지면 내 주변에서 관심 있는 이성을 찾는 애플리케이션과 비슷하게 또래 나이대에서 공유할 수 있는 삐삐사서함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랜덤 하게 누군가와 음성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가 나에게 음성메시지를 남기고 서로 목소리를 주고받는다니 정말이지 그 당시엔 떨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랜덤의 상대를 정하는 과정이 지금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무작위추첨이었을까? 아니면 여러 인사메시지들을 듣고 내가 상대를 선택하는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