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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낭만괴물 Sep 24. 2016

조선의 마지막 궁궐, 덕수궁

고궁산책, 정동길과 덕수궁을 걷다

서울에 살면서 처음으로 덕수궁 문턱을 넘었다.

궁 안팎을 걷기 좋아해서 경복궁은 여러 번 찾았었는데, 이상하게 바로 근처에 있는 덕수궁은 몇 번이고 그냥 지나쳐왔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궁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을까,
돌담길이 주는 아련함 때문이었을까.

햇살이 강렬히 내리쬐는 어느 가을날.
그토록 아끼고 아끼던 덕수궁을 다녀왔다.

가을 햇살과 함께 덕수궁을 두드린 이유는
아련함과 미련이 주는 슬픔보다는
가을 하늘이 주는 푸르름으로 덕수궁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슬픔보다 기쁨의 나라가 되길 희망하는 마음으로.
조선의 역사가 그러하길 바랬고,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길 바랬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대한문을 들어가기 위해 정동길을 먼저 걸었다.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는 길에 자주 스쳐 지나갔던 우리 부부의 대표 산책 코스인 정동길.
오늘은 특별히 여행자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나섰다.
햇살 좋은 가을날, 카메라만 손에 쥐었을 뿐인데 늘 보던 그 풍경들이 참 아름답게 다가왔다.

얼마 전 긴 여행을 다녀온 후,
일상을 여행처럼 살아야지 했었는데,
금세 또 하루하루에 치여 그 기분을 잊고 살고 있다.

작은 마음가짐의 변화로 일상이 여행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던 하루.




정동길은 정동교회 앞 사거리에서 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 앞을 지나 새문안 길에 이르는 구간을 말하며"서울시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로"라고 불린다.
1999년 서울시에서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되었고, 2006년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기도 했다.

흔히 정동길을 설명하며 [백 년의 시간여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구한말 한양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길은 개항기에 '신문화'를 도입하며, 최초의 신식 여학교인 이화학당, 배재학당, 독립 신문사를 포함하여, 여러 외국 공관들이 들어섰고, 최초로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이 세워졌다. 또한 최초의 개신교 예배당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개항 초기 그렇게 서양풍으로 변해갔던 우리의 정동길은 그 이후 한국 역사의 풍파를 고스란히 겪으며, 지금은 역사가 살아있는 서울의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가 되었고, 덕수궁 돌담길과 가로수의 낙엽이 주는 낭만을 간직한 아름다운 거리가 되었다.


사실 같은 곳을 가더라도 이렇게 간단한 역사를 알고 가는 것만으로도 몇 배나 큰 의미가 있다.

현재의 그 길만 걷는 것이 아니라, 100년 전의 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는 건 참 특별한 경험이다.

조선말, 서구문화의 이질감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조심스레 거리를 걸었을 사람들.
두려움이 익숙해져 때론 신비로움으로 바뀌었을 테고, 그 신비로움이 또 다른 두려움을 만들어 냈을 그 시절.
그 신비롭고 두려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지금은 서울의 가장 아름다운 길이 되어버린 그 아늑한 돌담길을 따라 여행자의 행복을 마음껏 만끽하고 왔다.



그리고 정동길을 걷다 보면,
내가 너무너무 좋아하는 카페가 있다.

바로 <전광수 Coffee house>.
뚜벅이로 서울 여기저기를 여행하던 대학시절,
처음 이 카페를 만났다.
당시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처음으로 더치커피를 맛보았던 그곳.
여기를 지날 때면 대학시절 자유롭고 풋풋했던 그때의 나를 다시 발견하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본격적으로 다시 정동길을 따라 쭈욱 걷다 보면, 덕수궁 대한문으로 향하는 돌담길로 이어진다.

이 곳을 지날 때면 늘 이문세 님의 노래가 생각난다. 참 감미로운 그 곡 <광화문 연가>를 떠올리고 있노라면 왜 이리 아련해지는지 모르겠다. 멜로디와 노랫말, 그리고 그걸 표현해 낸 가수의 음색이 조화를 이루어 귀가 아닌 가슴으로 들려오는 그 노래.

어쩌면 덕수궁 돌담길이 이문세 님의 그 노래 덕분에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기도 하다.




정동길은 찬찬히 걸으면 한 시간도 넘게 걸을 수 있는 거리고 빨리 지나가면 10분 만에도 갈 수 있는 그런 거리다. 가을에는 낙엽을 쓸지 않는 길로도 유명한 이 거리는 나에게 서울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 되어버렸다.


100년 전 서양과 조선의 문화가 공존했던 그 장소. <광화문 연가>의 노래만큼이나 아련한 아름다움이 그윽한 장소.


그렇게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그 길이 끝나는 곳에 시청 앞 플라자 호텔이 바로 저렇게 우뚝 솟아있다.

100년 전 그때로 돌아가 신구의 조화로움을 걷다 보면, 문득 그 100년 사이 새롭게 형성된 또다른 신구의 놀라움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서울의 심장에 있는 빌딩과 궁궐의 조화로움이 참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덕수궁으로 들어가는 입구, 대한문이다. 마침 수문장 교대식을 하고 있었다.


이 문턱을 넘어서면 바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궁궐이었던 덕수궁이 시작된다.



임진왜란으로 피신했던 선조가 한성으로 돌아와 임시로 거처했던 고단한 안식처.
중전의 자리를 내어놓고 폐위된 인목대비가 쫓겨났던 외로운 궁전.
고종 황제가 일본을 피해 옮겨 간 조선의 마지막 역사의 흔적.

일제는 우리의 지배권을 강탈한 후
조선 국권의 상징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덕수궁 터를 분할 매각시키며
우리에게 가슴 아픈 역사를 안겨주었다.

경성일보 사장 ‘요시노’가 기증한 벚나무 500그루가 덕수궁의 조경을 장악했고,
석조전은 일본 근대 미술품을 전시하는 ‘덕수궁미술관’으로 개관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그해 5월 돈덕전이 있던 자리에 동물원을 신설하며, 조선의 왕들이 머물렀던 고귀한 그곳을 동물들이 노니는 수치스러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해방 후에도, 온전히 우리의 궁전으로 돌아오지 못한 덕수궁은 1950년 6.25 전쟁 전까지 UN 한국 위원단에서 사용하게 된다.

그렇게 전쟁이라는 수난까지 겪게 된 덕수궁은
그 후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하며,
2014년에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이 개관되면서 다시 그 역사의 문을 활짝 열게 되었다.

고종이 휴식을 취하거나 연회를 베풀었던, 정관헌
광명문을 렌즈 속에 담으려고 하는데, 마침 햇살이 '광명'으로 스며들었다.



500년 조선왕조의 막을 내린 마지막 장소.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굳게 문을 닫고 명분뿐인 명분을 지키다가,

결국 나라를 잃게 된 그 아픈 역사의 흔적 속에서,

그 아픔을 알리 없는 사람들은,
지금 그 비통했던 땅을 밟고 걸으며,

그렇게 왕이 살던 집을 마음껏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운 모습이 바로 오늘이고,
역사의 흐름이고, 역사의 찬란함과 동시에 기쁨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뜨거운 가을 햇살과 높고 푸른 하늘이 배경이 되어
사연 많은 덕수궁은 아름다운 유적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껴두며 간직해왔던 덕수궁을 거닐던 시간.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아름다운 그 풍경을 카메라 렌즈 속에 담아보려 했던 가을날.

오늘만큼은 아련하고 슬픈 그 덕수궁을 뒤로한 채,
조선은 망했고 이제 대한제국으로 다시 태어나리라 공표했던 고종황제의 간절한 희망만 가득 느끼고 왔다.

석조전(石造殿)은 조선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궁궐 건물이다.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우리나라 최초로 서양식 정원이 지어진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 산책길. 흙길과 푸르른 나무들 사이를 걷는 행복이란.


나는 궁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100년 전 만해도 왕과 신하들만 걸을 수 있었던 그 땅을 밟고 돌담길을 거닐 때
현재의 풍요로움을 더 간절히 만끽할 수 있다.

그 좁았던 궁전에서 일생을 보내야만 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답답함과,
그보다 더 답답했을 왕의 삶이 느껴질 때, 현재의 삶이 주는 자유로움이 더 아름답게 다가온다.


관료들의 계급과 위치를 나타내주는 비석



햇살이 희미해지고,
추워지는 겨울이 오면 다시 덕수궁을 찾으려 한다.

그때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조선 마지막 궁전의 처량함과 500년 역사의 아름다움이 함께 공존하는 덕수궁의 아련함 속으로 한껏 빠져볼 생각이다.

역사가 주는 희로애락은 언제나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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