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괴물 Jan 25. 2017

한겨울의 한여름 여행, 사이판

낭만부부의 결혼 1주년 기념여행


푸른 바다와 하얀 모래가 있는 해변,

내리쬐는 햇볕과 읽을 책 몇 권.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작년 오늘,

몇십 년 만에 가장 추웠다는 바로 그날 이후

꼬박 일 년이 지났다.


내 생의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자

올해도 변함없이 가장 추운 겨울날,


우리는 한겨울의 한여름을 찾아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냥, 따뜻한 곳으로.

가끔은 뜨겁기도 한 곳으로.

추억과 경험을 쌓아 올리기보다는

생각과 일상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가끔 우리에게는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상의 고민들과 책임감을 잠시 내려놓은 채
그냥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만끽하는 시간.


무언가를 채우려고 발버둥 치지 않아도 되는,

아니, 최대한 무언가를 내려놓고 버려두어야 하는 이 여행은,


자본주의에 역행하는 가장 아름다운 반항이 아닐까 싶다.


새벽에 내린 눈때문에 열심히 활주로 제설작업을 하시는 분들. 이 아름다운 풍경과 3시간의 연착시간을 맞바꾸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할 수 있지만, 공항에 머무르는 시간은 여행의 일부분처럼 느껴진다. 공항은 늘 그렇듯 묘하게 매력적인 곳이다.
그렇게 도착한 사이판의 리조트에서 찍은 사진. 모든게 용서되는 순간.


왜 하필 사이판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즉흥적이게 가장 잘 쉴 수 있는 여행지를 찾다가,

이 서태평양 한가운데 덩그러니 있는

북마리아나제도의 한 섬나라가 돌연 눈에 들어왔다.


이미 휴양지로 너무나 유명하지만,

우리 둘 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기에 호기심이 있었고, 무엇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는 장점이 더해졌다.


일본과 미국이 전쟁을 위해 거주했던 곳.

전쟁과 함께 여러차례 주인이 바뀌며 제2차 대전의 역사적 흔적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사실 이 작은 섬나라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빛나는 자연과 공존하며 살아왔을

원주민들의 과거를 가로채가는

역사의 불편함을 잠시 생각했지만,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여행은

그런 불편함마저 잊고 떠나자 다짐했기 때문에

역사학도의 쓸데없는 비판은 덮어두기로 했다.



해변가의 석양은 언제나 사람을 뭉클하게 만들어 준다. 이번에도 예외는 없었던 것 같다.
마이클 조던을 존경하는 아티스트 최군의 뒷모습.


누구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젊을 때는 휴양이 아니라

많이 보고 경험해야 한다고.

사서 고생해야 한다고,

꽃보다 청춘이라고.


당연히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청춘도 좀 쉬고 싶을 때가 있다.

우리의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고,

소진된 자유함을 채워주지 않으면 언젠가는 방전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때론 필사적으로 쉬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다와 태양이 있는 곳으로 떠나야만 한다.


여행을 통해 좀 더 자유롭고 싶었다.  

자유는 여행자의 특권이기때문에.


여행을 떠나오고 나면

보이지 않는 사회의 규범들과

하루가 주는 책임감 속에 얼마나 속박되어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일상과 주위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의식하며 살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저 떠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내팽개쳐둔다는 것만으로도,

먹고, 자고, 쉬는 행위를 단 며칠 동안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 자유의 영혼이 채워지는 느낌을 받게 된다.


몇 해 전 삼성에서 선이 없이도 바테리 충전기기에 스마트폰을 올려놓으면 자동으로 충전이 되는 기술을 내어놓았다.


비유하자면 하루 종일 해변에서 바닷바람을 맞고 누워있는 시간이 나에게는 그런 시간이었다.


섬나라의 모래 냄새가 도시의 슬픔을 날려주었고,

뜨거운 태양과 함께 불어온 바람은 어깨에 눌러앉아있던 피로 곰들을 데려가버렸다.


몇 시간 동안이나 태닝을 하며 누워있는 내 옆에서,

함께 이 낭만을 즐겨준 아내가 참 고마울 따름이었다.





여러 여행이 있지만,

이번 여행은 최대한 생각하지 않기로 하며

각자 읽고 싶던 책을 3권씩 넣어갔다.


양귀자 님의 <모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김훈 님의 <라면을 끓이며>


나는 이 세 권의 책을 챙겨갔다.


근 몇 달간 소설을 읽고 싶은 욕망에 시달렸다.

그간 읽었던 책들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경영학 서적이나 마케팅 서적은 집중이 안된다.


대게는 너무 이성적인 글들이 모여있어서 그런 것 같다.

여러 케이스를 모아놓고,

작가가 생각하는 정답을 내어놓고,

그렇게 해야 되는 이유를

아주 논리적으로 적어두는 책들.


세상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개개인의 그 특수성으로 아름답게 돌아가는데

그것을 수렴한 무언가의 조언과 법칙이 나온다는 사실은

마치 나의 행복 방정식을 타인에게 그대로 대입하려는 오만과 같다는 생각을 종종한다.


각자의 행복 방정식은 너무나도 다른데,
서점에는 너도나도 인생의 정답을 내어놓고 있다.


경영과 경제학 중심 사회가 가져온 함정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소설이 좋다.

문학은 절대로 오만하게 인생의 답을 내놓는 적이 없다.


소설은 그저 여러 삶의 이야기들을 잘 묘사하여 보여준다.

책을 읽는 동안,

그저 감정이 메마르지 않게 끊임없이 어루만져줄 뿐이다.

그리고는 독자의 상상력에 모든 것을 맡긴다.


타인의 개별성에 개입하지 않고,

단지 새로운 삶의 시선을 느낄 수 있도록

재밌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그리고 그 안에 잔잔한 위로를 첨가해 주는 것.


이것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물론, 책이라면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번 여행에서는 그저 '정답에 대한 강요'보다는

'이야기를 통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그렇게 내가 너무 좋아하는 책 세 권을 보물처럼 넣어와서는 잠을 설쳐가며 다 읽었다.

(김훈씨의 책은 소설이 아닌 수필집이지만,

김훈 아저씨는 김훈 아저씨기 때문에 통과)


해변을 지키는 이의 뒷모습이 너무 평온해 보였다. 마음의 여유를 가져다 주는 뒷 모습.
해질녘 리조트 수영장의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결혼 1주년을 자축하기 위해서이다.


부부가 되어 1년 동안

꿈꾸던 결혼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감사를 담아,

서로와 스스로에게 상을 주는 여행이다.



낭만 부부가 되자고 선언한 지 1년.


더 많이 낭비하자고 했고,

더 많이 베풀자고 했고,

더 많이 사랑하자 했는데,

그러다 보니 1년이 훌쩍 가버렸다.


MJ.


우리 서두르지 말자.


지금처럼 오늘의 행복을 쟁취하며 살아가자.


지금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너그럽게 살아가자.


난 네가 먼저 양보하는 모습이 참 좋다.

손해를 좀 보더라도 돌아가는 그 모습이 참 좋다.

언제나 겸손해하는 모습이 참 좋다.

작은 일에도 감사해하는 그 모습이 참 좋다.


회사에서 퇴근한 뒤 동료와 상사의 흠을 찾는 게 아니라,

자기가 일을 잘 못하는 것 같다고,

팀원들에게 도움이 못되는것 같다고 하소연하는

약한 너의 모습이 참 좋다.



참 뻔한 여행지가 뻔하지 않은 이유.

당신이 함께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우리 지금처럼 많이 웃으며 살아가자.

1년 동안 고생많았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매거진의 이전글 가을 캠핑이 얼마나 좋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