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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Mar 13. 2022

차이코프스키,
나 대신 당신을 미워합니다

- 혼자 여행 에피소드, 160만원이 걸린 치열한 6시간 (2부)

- 혼자 하는 여행은 서럽다, 160만원이 걸린 치열한 6시간 (2부)- 혼자 하는 여행은 서럽다, 160만원이 걸린 치열한 6시간 (2부)

 '판타지아(Fantasia)'⑴라는 애니메이션을 아는 사람이 의외로 드물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뽀로로 대신 판타지아와 함께 자랐다.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음악에 맞춰 형형색색의 꽃과 버섯이 춤을 추는데, 그 꽃잎이 커다란 치맛자락이 되기도 하고 잎사귀를 사지처럼 흔든다. 버섯은 그 부분(?)이 원래부터 엉덩이인 것만 같다. 거의 넋을 놓고 그걸 몇 번이고 돌려보며(비디오테이프라는 문화가 있었더랬다) 무대 대형과 안무 구성을 외울 지경까지 이르렀다. 다 큰 어른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 나를 매혹한 것이 '차이코스프키'였다는 것은. 

 

 비자를 구할 수 없는 여행경로를 잘못 선택한 탓에, 나는 곧 이륙 예정인 멀쩡한 러시아 항공의 비행기 티켓을 놔두고 새 티켓을 알아봐야 했다. 휴대전화 화면으로는 계속 저렴한 새 티켓을 알아보면서, 이어폰으로는 취소해야 하는 티켓을 구매한 해외 에이전시의 상담원을 애타게 기다리며 낯선 통화연결 대기음을 듣고 있다.

 "뚜- 딸칵, 뚜-딸칵"

이런 멋없는 대기음이 속절없이 길게도 흘러나온다. 하지만 머릿속으로는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을 듣고 있다. 어린 시절 판타지아에서 봤던 그 버섯들이 정신없이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돈다. 나를 놀려대는 기분 나쁜 환각 같은 춤!


'쿠바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모스크바를 경유해서 발레 공연을 볼 수 있다면?!'

나의 이 어리석은(?) 열망이 지금의 절망적인 상황을 만든 것인가! 발레가 아니었다면, 차이코프스키가 아니었다면 나는 러시아를 경유하는 항편을 택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차이코스프키에 들떠서 오늘의 이런 곤란을 예상하지 못하고 기대감에 잔뜩 설렜던 내가 밉다. (아주 조금 밉다. 사실 나를 죽자고 미워하지는 못하더라.) 

(슬픈 에피소드의 1부는 아래 링크를 누르면 볼 수 있다.)


(링크)



 알아듣기 쉽지 않은 발음의 상담원과 연결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약번호 LZSVPK를 불러주는 것조차 수월하지 않다. L of Lemon, Z of zebra... 이런 식으로 천천히. 오늘의 S는 내게 sorrow(슬픔, 애환)이고, V는 visa(비자, 사증), P는 prohibited(금지된), K는 kick(발로 차다)이다. 현재의 심리와 정신상태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참으로 마음에서 우러난 단어 선택이 아닌가!


결론은 항공권 환불 불가. 경유지에서의 순조로운 일정을 위해 미리 구매한 모스크바 유심(U-SIM)칩과 공항철도 티켓, 발레 공연 티켓까지 날린 거라 손실은 160만원 정도. 허허, 인생에는 이런저런 사고가 나곤 하는 거겠지. 즐겁게 일해서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돈을 벌고 있다고 생각했음에도 160만원이라는 돈은 내게 그저 웃어넘길 수 있는 손실은 아니었기에, 일부러 쥐어짜 보는 너털웃음이 꽤나 쌉쌀했다. (이럴 때 독한 술을 넘기면 더 달다던데!)


다행히 에어캐나다 항편을 찾았지만 티켓 판매 에이전시는 스페인이라 아직 영업시간 전이군. 일단 별 수 없이 발권 대기 상태. 거의 날을 새고 공항에 간 데다, 이런 일이 터져서 계속 배낭 메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더니 체력은 바닥이 났다. 몸도 마음도 헛헛한 상태로 공항에서 다시 집으로 가는 길. 눈치 보다가 이제야 허락이라도 받은 듯이 터져 나오는 눈물과 헛웃음을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다. 혼자 하는 배낭여행의 설움을 출발하기도 전부터 절절하게 느낀다. 


 검색해도 정보가 없는 여행은 왜 이리 서러울까. 신나게 메고 나갔던 배낭을 터덜터덜 끌고 와서 침대 옆에 툭 내려놓았다. '휴일이라 설마 발권 안 되나? 일요일인 내일 아침 이륙인데?' 하는 우려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기에 스페인 영업시간에 맞게 알람을 맞춰놓고 일단 몸을 좀 뉘어본다. 육체의 피로를 틈타서 '이 때다' 하고 거창한 설움이 돌진해 온다. 나의 '혼삶'도 이렇다. 결혼하지 않고 혼자 지내는 삶에 대한 역사는 그다지 길지 않아서, 검색하듯 뒤져봐도 참고자료(reference)가 부족하다. 사전 정보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떠나는 여행에서는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실수나 손실이 생기기 마련이다. 장기적인 혼삶을 계획하는 나는 이런 설움을 심심치 않게 마주할 것이라는 얘기다. 남들 따라서 큰길로 가지 않고 인적 드문 낯선 길로 가는 것, 프런티어 정신을 가진 첫 빠따(?)는 이렇게 종종 서럽다고! 서럽... 다..... 고...... 쿠울 쿨...(숙면)




 자고 일어났더니 발권완료 메일이 와 있다. 다시 공항으로 향하는 길에 보란 듯이 차이코스프키를 들었다. 

이 거친 에피소드를 혼자 겪어냈다는 것이 새삼 다행스럽다. 일행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필요도 없고, 각자의 대안을 내세우다가 마음이 긁힐 일도 없었다. 오로지 나만이 아는 추억이다. 참으로 비싼, 허허 -  







⑴ 1940년作 디즈니의 세 번째 장편 애니메이션, 'Fantasia'.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형태로서 당시 천문학 적인 제작 비용이 들었다고 한다. (출처: 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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