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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Jun 16. 2022

성감대 vs 정(情)감대

혼삶에서 더 절실한 것은 무엇인가, 영혼과 육체를 위한 고민.

 나는 어른들이 반기는 조숙한 초딩이었다. 당시의 조숙함이라 하면, 다루기 편리하고 함께하기 편안한 아이였다는 뜻이다. 속으로 백 마디 말을 떠올리다가 결국 말없이 웃음으로 대답하곤 했다. 그 온화한 초딩은 딱히 싫단 소리도 없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새벽 산책을 다녔다.


분명 10분 전에 아파트 주차장을 지나쳤는데 어느새 100년 넘었을 것 같은 나무 밑 정자가 보이다가, 이윽고 개울 소리도 들리고 주변이 논밭으로 가득 차는 그런 경험. 몇 학년인지 열 번도 넘게 물으시던 시골 어르신께 옥수수 같은 걸 받아서 돌아오기도 했다. 그때 나는 영혼이 뭔지 잘 몰랐지만, 이건 마치 매일 아침 내 영혼을 꺼내서 시골 새벽바람에 헹구고 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는 5학년이 되었고 할아버지는 한 살 더 지치셨다. 벽 4시 30분이 되어도 나가자고 챙기는 사람은 없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나는 주섬주섬 그 시간에 밖으로 나섰다. 시골 마을 대신에 놀이터로 가서 맨손체조(!)를 했다. 이어서 그네를 타며 명상시간(!!)을 갖고, 서서히 밝아오는 아침 하늘을 보다가 집에 들어와서 등교 준비를 했다. 이것은 아침마다 스스로의 영육(靈肉)을 돌보는 루틴으로 자리 잡았고, 이 애늙은이가 진짜 늙은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자연 소멸했다....... 허허



 

 영육의 조화. 뇌과학, 호르몬의 영역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공식화하는지의 구조(mechanism)까지는 당시엔 생각지도 못했지만, 운 좋게도 이렇게 자연과 사람을 통해 일종의 순환 같은 것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내 신체에 일어나는 일 - 어떤 감각으로 내게 와닿고 - 그 자극은 어떤 기분이나 정서가 되어 - 영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마치 인생의 단계마다 이 순서대로 무언가에 몰두하며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신체' 그 자체와 감각적인 스킨십에 집중하던 청소년기를 지나서, '로맨스'로서의 정서적인 성공경험을 쌓는 데 여념이 없이 성인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점점 더 영혼을 관통하는 무언가를 갈망하게 되었다고 할까.


이런 청소년기의 핵심 과제(?)에 충실했던 덕에 적어도 나 자신을 신체적으로 만족시키는 방법은 잘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감대의 좌표를 특정하고 그것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에 약간의 뻔뻔함이 필요하기도 했다. 꾸준한 훈련과 용기 있는 도전(?)을 거듭하다 보니 효율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 나름대로 익숙해졌지만, 아무리 눈을 질끈 감고 해 보려 해도 안 되는 게 있더라. 그건 바로 나의 정()감대를 알리는 것. 내게 쾌감을 달라고 적극적으로 유도할 수는 있으나, 나와 진중하게 정을 통하자고 나를 드러내는 것이 아직도 그토록 쑥스럽고 망설여진다. 나는 어깨 뒤쪽을 살포시 짚어주면 갑자기 설레고 벅찬 기분이 든다고. 내 발등에 누군가의 발등을 비비면 영화 <아바타>에서처럼 잠시나마 상대와 연결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날개뼈 사이의 그 어딘가를 어루만지면, 지은 적도 없는 죄를 내려놓고 버겁게 느껴졌던 어떤 장애물을 풀쩍- 뛰어넘을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솟는다고. 그렇게 갑자기 웃음이 나기도, 갑자기 눈물이 나기도 한다고.




 성감대가 신체 구조 상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취약한 곳에 해당하는 경우가 많듯, 정감대도 내 정신의 취약한 부분으로 이어지는 문 같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기에 성감대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접촉방식이 정감대에는 적합하다고 느낀다. 정감대를 만족시키기 위한 궁극의 스킨십은 단순히 닿거나, 찌르거나, 누르거나, 잡는 등의 다양한 방법을 넘어서야 한다. 따뜻하게 감싸고 덮어야 한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서 나쁜 꿈을 꾸며 잔뜩 찌푸리는 여주인공(하지원 분)을 바라보던 남주인공(현빈 분)은 가만히 자신의 손가락을 그녀의 이마, 정확히는 미간 사이에 살포시(그러나 꾸욱-) 올려놓는다. 그러자 꿈틀대며 구겨졌던 미간이 펴지며 그녀 얼굴 전체의 긴장이 풀렸다. 나쁜 꿈을 따뜻한 손가락으로 녹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미간 사이 그곳이 그녀의 정감대라고 느꼈다. 서로의 정감대를 어루만지는 건,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따뜻한 마사지 같다. 울퉁불퉁 불규칙하게 굳어있는 정서와 영혼을 풀어주는 마사지.



한 번만 만지고 싶다.

 내가 가장 얼토당토않다고 생각하면서도 빠져들었던 사랑 이야기인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전지현 분)가 기약 없이 헤어진 도민준(김수현 분)을 그리워할 때 '보고 싶다' '안고 싶다'가 아닌, 한 번만 '만지고 싶다'는 말을 나지막이 뱉으며 사무친 그리움을 토한다.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는 여러 형태로 발현되지만, 그중에서도 '닿고 싶다'에 해당하는 이 마음은 왜 이렇게도 짠할까. 내가 죽을 것처럼 사랑한 연인과 6개월 넘게 만나지 못했을 때, 가장 사무치게 그리워한 건 그의 어깨도 입술도 아닌 '뺨'이었다. 내게 가장 사랑스러운 그 얼굴에 내 손을 살짝 갖다 대고 그저 엄지로 살짝 쓸어주고 싶었다. 어여쁘고 소중한 뺨을.




 혼자 살기로 계획한 내가 박완서 작가의 소설 <황혼>을 처음 읽었을 때 뜬금없이 이런 걱정을 했었다.

'언젠가, 정감대를 나눌 누군가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누구와도 닿지 않고 살게 되면 어떡하지?'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사람을 필요로 하고, 사람과 관계하는 그 난도 높은 미션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만들기 위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사회적, 신체적 접촉에 쾌감이 따르도록 설계된 존재라는데…. 혼자 살기 때문에 생존에 불리해질 수야 없지. 혼삶은 더욱 적극적이고 탄탄한 인간관계로 이를 상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갑자기 명치 쪽이 매우 갑갑해졌다.


 그 사람 마음을 다 알 것 같고 그 사람도 나를 전부 알아주는 것만 같아서 뜨끈하게 울컥해지는 그런 애정이 오가는 곳이 정감대이다. 누군가 나의 정감대에 충실한 애정을 쏟으면 어떨까, 그럴 때의 나는 온몸이 성감대가 될 것 같은데?





⑴ <행복의 기원> (서은국 지음) 중에서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확보해야 했던 또 하나의 절대적 자원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사람’이다. 먹는 쾌감을 느껴야 음식을 찾듯 사람이라는 절대적 생존 필수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인간을 아주 좋아해야 한다. 타인을 소 닭 보듯 바라보는 사람에게 친구나 연인이 생길 리 없다. 이런 ‘사회적 영양실조’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왕성한 ‘사회적 식욕’을 갖는 것이다. 식욕의 근원은 쾌감이다. 그래서 사람(특히 이성)을 만나고, 살을 비빌 때 뇌에서는 사회적 쾌감을 대량 방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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