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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야인 한유화 Mar 11. 2022

첫사랑 같았다, 혼자 하는 여행의 시작은.

- 쫄보(?) in 나폴리(Napoli)

  처음으로 혼자 한 여행의 기억은 마치 첫사랑처럼 남아있다. 미화할 필요도 없고 퇴색될 우려도 없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던.




 이탈리아의 나폴리, 강도 수준의 소매치기로 악명 높았던 당시의 그곳에서 혼자 하는 여행을 시작했다. 여정을 함께 하던 대학교 선배 언니는 이제 저녁 기차를 타고 로마로 떠나려 한다. 손을 세차게 흔들며 작별 인사를 전하고 있는 그때, 의심할 여지없이 수상한 기운을 폴폴 풍기는 한 사내가 음침한 표정으로 언니의 뒤를 따라 기차에 오르는 것이 아닌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은 그의 양손을 꺼내면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에, 나는 다급한 표정으로 기차 안의 언니에게 고래고래 소리치며 갖가지 수신호를 보냈다. 눈치 빠른 언니는 일부러 여러 칸을 지나쳐서 슬쩍 기차에서 내렸는데, 아니 세상에 그 몹쓸(?) 녀석도 따라 내리는 게 아닌가! 언니를 따라서 기차에 타고 내리기를 수차례 반복했으나 언니는 요령 좋게 점프하듯 마지막 승차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고, 녀석은 수상한 의도를 실현하지 못한 채 덩그러니 플랫폼에 남겨졌다. 나와 눈이 마주친 채로.  


종전의 수고스러운 실랑이가 실패로 끝난 것을 원망이라도 하는 듯 입을 씰룩거리던 그 녀석. 분명 '녀석' 정도로 보였던 그 사내는 나와 1:1로 대치하자 갑자기 전문적인 '꾼'으로서의 아우라를 드러내며 내 쪽을 향해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두운 시멘트 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왠지 더 무서워 보였다.) 플랫폼을 빠져나가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척 평안한 표정을 지어내며 그의 옆을 지나치는 그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레 그에게 뒷모습을 보이는 형국이 되었다. 야속하게도 금세 깜깜해진 나폴리 거리는 이정표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웠지만, 그 녀석이 계속 따라오고 있다는 것만큼은 잠깐 고개를 돌려도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나는 명색이 합기도 4단, 대회에서 메달을 따기도 한 무도인 이건만, 그런 순간에는 싸워 이겨야겠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사라져 줬으면……'하고 바라게 되는 것이었다. (사실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갑자기 그를 제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20분 넘게 진땀 나는 동행을 계속하고 나서야 겨우 다른 행인을 발견했고, 길을 묻는다는 핑계로 행인과의 대화를 길고 길게 이어감으로써 그 사내를 지쳐 떨어져 나가게 하는 데 성공했다!  




한번 쫄보(?)가 된 마음은 쉽사리 펴지지를 않아서 게스트하우스에서 체크인을 하면서도 한 번씩 현관문을 흘끔거렸다. 이런 상태로 방에 들어와 2층 침대에 배낭을 풀고 나니 땀범벅이 된 온몸에 카프리 해의 소금기가 덕지덕지 묻어있었다. 따뜻한 물로 천천히 샤워를 하니 긴장되어 있던 몸이 녹녹해지고 편안해지면서 비로소 이제 혼자 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인실 도미토리였지만 방에 있는 것도 나 혼자 뿐이었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지도 않고 빈 몸(?)인 채로 샤워실을 나와서 방에 있는 큰 창문을 두 손으로 열어젖혔다. 허전한 몸 사이사이로 꽤 낯선 찬바람이 휘감았다. 비행기로 12시간 이상 날아야 올 수 있는 먼 이국 땅에 홀로 있다는 것. 갑자기 외롭고 고독한 마음이 울컥하고 치밀어 올랐다. 그러다 정말 혼자라는 것을 실감했을 때, 갑자기 차분하고 평온한 기분이 들더니 신나고 설레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작은 볼륨으로 소리도 지르고 춤추듯 사지를 이리저리 뻗어댔다.


그래, 항구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나폴리였지. 작고 고요하게 반짝거리는 항구를 바라보다가 마침맞게 터져 나오는 불꽃놀이를 보았다. 이런 때에는 누구라도 낭만적인 기분으로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기 마련이다. 차오르는 두 눈을 창밖에 고정한 채로 생각했다. 혼자이기 때문에 얼마나 가벼워질 수 있는지를, 혼자이기 때문에 견뎌야 할 것들은 얼마나 무거운지를.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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