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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Dec 14. 2021

처음으로 현금 케이크를, 처음으로 생일 미역국을

소소하지만 우리에겐 행복





지난 일요일은 남편 생일이었다.

그래서 생일여행 겸 둘이서 떠나는 마지막 여행으로 (앞으로는 무조건 세 식구) 1박 2일 변산반도 부안을 다녀왔다. 부안은 우리가 첫 연애할 때 갔던 곳. 7년 전과는 많이 달라진 변산마실길과, 채석강과, 내소사를 걷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차밍아 여기 아빠 엄마가 데이트 왔던 곳이야~"


특히 변산마실길은 정말 죽어라 걸었었다.

한여름에 뜨거운 아스팔트 길도, 풀이 무성한 수풀 길도, 또 굿이 열리던 바닷가 해신당도 지나며 거의 탈진 전까지 걸었던 우리. 그렇지만 연애할 때 잊지 못하는 순간을 꼽는다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선명한 추억이다.

첫 번째는 3일인가 4일 내내 매일 부산에서 만나다가 마지막 날 예상치 못한 고백받았던 거고,

두 번째는 변산마실길 위에서 원모어찬스 노래 '내 안에 하늘과 숲과 그대를~' 떼창 하며 걸었던 것,

 번째는 천둥번개 비바람 몰아치는 83타워 위에서 첫키스했던...그밤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여행을 다녀와서 주말에 시부모님이 함양엘 오셨다. 한 손엔 미역을, 다른 한 손엔 케이크를 들고, 또 아들 생일 용돈과 며느리 임신축하금을 준비해 오신 두 분. 센스 넘치셔. 비록 외식하려다 갑자기 집에서 고기구워먹자시는 아버지를 어머니와 남편이 양쪽에서 잔소리혼꾸녕을 내긴 했지만 :P 그덕에 난 소고기랑 치즈랑 고추냉이라는 환상 조합에 눈 떴다. 배불러도 삼합이 멈출 줄 모르고 들어갔다. 단백질 보충 제대로 한 저녁밥상.


다음날 만삭의 임산부는 새벽 5시에 깼다. 일찍 일어난 김에 이벤트나 해보자! 생일 돈케이크를 해주는 걸로. 마침 셤니가 현금지원도 해주셨겠다 딱이다. 원래 구상했던 위치는 현관이었지만 두 분 계시는데 민망해서 안방 화장대 거울로 선택. 남편이 부스럭 댈 때마다 깰까 봐 화장실에 숨었다가 다시 나왔다 반복하길 수십 번. 불도 못 키니 깜깜한 방 안에서 휴대폰 손전등 약하게 비추고 했다. 마지막엔 거울에다가 립스틱으로 축하 메시지 쓰려고 했는데 그러다간 진짜 깰 것만 같았다. 그래서 화장실에 숨어서 메모지에다 휘갈겨 적어 거울에 붙였다.


'늘 항상 내게 최고의 남편,
차밍이에게 최고의 예비아빠,
부모님들께 최고의 아들이자 사위인 너.
태어나줘서 고맙고 사랑해'



그리하여 탄생한 생일돈케이크


이제 남은 건 미역국 끓이는 일. 근데 문제는 전날 저녁 고기 사러 나가는 남편에게 국거리용 양지도 사 오라고 일렀건만 안 끓여도 된다며 사 오지 않은 그. 미역국에 넣을 소고기가 없다. 그렇다고 조개나 황태가 있길 하나. '고기를 사러 혼자 나가야 하나...? 마트든 정육점이든 못해도 오전 9시는 돼야 열거고 그럼 아침이 너무 늦어질 텐데' 생각을 하며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부스럭, 옆에서 자던 남편이 깼다. 깬 김에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이벤트 한 거 발견했으면 싶어 자꾸만 괴롭힌 나...ㅋㅋㅋㅋㅋㅋㅋ


그러다 슬며시 미역국을 물어봤더니 집에 갈비탕 있지 않느냐고. 그걸로 갈비탕미역국 끓이면 되지라고 잠꼬대하듯 말한다. 코웃음을 치다가 문득 검색을 해봤다. 근데 있다. 꽤 맛있다는 평도 많다. 오호. 당장 미역을 불리고 갈비탕을 데웠다. 불린 미역을 빡빡 씻은 뒤 마늘 다져서 넣고 볶볶. 들기름을 넣으면 더 맛있고 풍미가 좋다지만 없으니 하는 수 없이 참기름. 적당히 볶아주다가 물을 붓고 끓였다. 팔팔 끓은 미역국에 따로 끓여둔 갈비탕을 부어 섞은 후 같이 20분간 더 끓여주었다. 나는 워낙에 싱겁게 먹는 터라 내입에 좀 짜다 싶게 간을 맞추면 완성.


뒤늦게 일어난 남편이 방에서 나왔다. 표정을 보니 거울의 현금케이크를 발견한 모양이다. "누가 저런 깜찍한 이벤트를 벌이래." 하고 웃었다. 발견하는 장면을, 놀라는 표정을 봤었어야 했는데 아침 차리느라 놓쳐 아숩숩. 그러고 보니 지난 5월 임신 사실을 서프라이즈로 알렸던 때도 포착 못했다. 내 계획은 남편이 씻으러 들어간 사이에 두줄의 임신테스트기와 차밍이가 쓴 걸로 가장한 편지를 침대 머리맡에 놓아두는 거였는데. 내가 먼저 씻는 동안 아이패드 파우치 속에 숨겨온 임테기와 편지를 남편이 발견해버렸다. 나오자마자 "왜 이렇게 허술한데다 넣어온 건데ㅋㅋㅋㅋㅋㅋ" 하면서 비웃었던 그때. 본래 이벤트는 약간 허술한 맛도 있어야지(?)


남편은 두 달 전 내 생일날

잡채도 하고 우엉조림도 하고 미역국도 끓이고

생일 한 상을 차려주었었다. 그때의 답례야 나도 : )


그때의 맛 잊지 모태. 인생 우엉조림


태어나 누군가에게 미역국 끓여준 건 우리 둘 다

각자 어머니께 말고는 처음이다. 참 다행이다.

부모님들에게 먼저 해드려서.

그렇게 처음으로

생일맞이 돈다발 케이크를 준비하고

급조했지만 갈비탕 미역국을 끓였다.


그러고 보면 서로 참 이벤트 많이 했었다.

옛날에 연애할 때는

그의 생일을 맞아 런닝맨 이벤트로 10가지 미션을 다 끝내야지만 선물과 여친을 만날 수 (?) 있게 했고. 또 그는 내 생일이라고 노래까지 녹음해서 불러줬고(디지털 발매 싱글 앨범이라며 냈었다ㅋㅋㅋㅋㅋ)

그리고 결혼 프러포즈는 내가 먼저.

그가 있던 영해의 한 레스토랑 사장님과 쿵짝을 맞춰 라디오 사연처럼 틀어놓고 후식으로 나온 커피잔 바닥에 "나랑 결혼해줄래?"를 새겨서 서프라이즈 프러포즈를 했었고. 그는 답 프러포즈로 셀프 웨딩촬영 갔던 울릉도 눈이 펑펑 쏟아지는 설원 위에서 노래와 함께 스케치북 이벤트를 했었다.



내가 했던 라디오 프러포즈,
그가 했던 설원 위 프러포즈.


내년에 차밍이 태어나면 정신없고

서로에게 소홀해지기도 쉽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런 소소한 이벤트도 하고

재밌게 살자.



30+α 생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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