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에 대하여 2/3
청첩장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청첩장에 큰돈 들이지 마라"
"어차피 사람들은 한 번 보고 버리니 사진 넣지마라"
따위의 말들을 귀 따갑게 듣고 눈 아프게 보았어서
한때 내가 직접 만들면 잘 만들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나, 포토청첩장은 애초에 마음을 접었었다.
보통의 예신처럼 몇 군데 청첩장 업체에서
샘플을 받은 뒤 그중에서 추리고 추려
아주 일반적이고 무난한 청첩장으로 골라
주문을 앞둔 상황이었다.
주문을 하려다 매수 고민에
"내일 양가 부모님께 확실한 매수 물어보고 주문하자." 했는데, 그다음 날 나는 책모임에 갔다.
책방 사장님, 가방 만드는 사장님, 청 만드는 사장님, 잼 가게 사장님(나), 미술학원 원장님으로 구성된 다섯 사장님들의 책 모임. 그곳에서 나의 결혼 소식을 들은 미술학원 원장님이 물었다.
"아라씨 청첩장은 (당연히) 직접 만들거죠?"
정곡을 찔린 듯했다. 그래 행사할 때마다 매번 포스터도 직접 만드는 나니까 그렇게 보실 법 하지.
"네...? 아니요 그 꿈은 접었어요ㅜㅜ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드니까요." 대답했더니 청첩장 직접 만드는 게 오히려 비용이 더 안 든단다. 게다가 기혼자인 본인도 만들어봤었다고. 그리고 만든다면 얼마든지 도와준다고. 그렇게 해서 어쩌다보니 나는 청첩장을 직접 만들게 되었다(사서 고생하는 그 늪에 또다시 빠지게 되었다는 말과 동일)
맨 처음, 셀프청첩장에 들어갈 문구를 떠올렸다.
다음으로 우리 모습을 담을 일러스트를 구상했다.
평소 좋아하던 작가도 컨택해보고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도 찾아보았지만 예상보다 소요기간이 너무나 길거나 혹은 작업비용이 너무 비쌌다. 고민하다가 문득 생각난, 수진언니. 수진언니는 지난 번 관계에 대한 글에서도 말했듯 천연발효빵을 배울 때 만난 사이로 현재는 고양이를 주제로 도자기 소품을 만들고 있다. 한때는 잘 나가는 디자이너였기도. 언니가 그리는 반려견반려묘 보호자 그림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어 친한 동생에게 줄 선물로 따로 주문한 적도 있었다. 아무튼 이 언니의 그림체로 우리 모습이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락했고, 결혼 소식에 뒤집어지게 놀랐다가 곧 흔쾌히 해준다는 언니. 심지어 페이는 어느 정도 드리면 될까 물었는데, 한사코 사양하며 결혼선물로 그려주겠단다.
그리고 얼마 후, 콩맨과 나 우리 두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을 받았다. 원래 부탁한 등산복 입은 모습뿐만이 아닌 울릉도 가서 찍은 셀프 웨딩 촬영 때의 우리 모습까지. 콩맨은 그냥 그의 모습 그대로 싱크로율 100000%. 정말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나는,
몇 가지 수정사항을 부탁했다.
신랑 - 베이지색 수트에 검정 보타이,
가슴에 부토니에
머리 조금만 더 길게
신부 - 드레스 어깨 덜 노출되게 > 드레스 변경
부케 - 하얀&초록 들꽃 같은 스타일
부케를 아래로 늘어뜨려 들고 있는 모습
상언 그리고 아라
2020년 4월 11일
그리고 또 2주쯤 지나서, 언니가 수정해온 그림과 함께 내지까지 모두 구성해준 파일을 보내왔다.
원하던 대로 콩맨은 베이지색 수트를 입고,
나는 비록 본식 때는 못 입지만 로망의
시작바이이명순 워너비 드레스를 입고 있는 모습,
부케도 더 자연스럽고 내추럴한 대형 부케로 해서.
너무너무 마음에 드는 2차 캐리커쳐와,
그에 반해 다소 아쉬운 청첩장 디자인.
폰트도 그렇고, 아기자기 귀여운 레이아웃이 마치 웹툰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도 보더니 단박에 "이거 니 스타일 아니네." 애써 오랜 시간 그려주었는데 다시 이거 고쳐달라 저거 고쳐달라 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그대로 쓰기엔 도저히 백프로 마음에 들진 않고. 그래서 결국 일러스트 파일을 받고 포토샵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쳐보기로 했다.
그렇게 주말 틈틈이 작업을 했지만,
결국 설날을 앞두고 나는 명절선물세트
잼 생산과 배송 대란에 빠졌고
(최근에 브런치도 잘 올리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
청첩장 완성과 주문은 저 멀리로...
그래도 일요일 쉼날, 일도 해야 했는데 카페에 노트북 가지고 가서 열혈 스피드 올렸고, 거의 작업 막바지에 두고서 스톱. 화요일인 오늘 퇴근하고서 집요하게 몇 시간을 붙들다 결국 완성을 했다. 양가 부모님이 사용하실 주소 적힌 봉투 시안도 후다닥 만들고 300장 주문을 넣었다. 수고한 나 자신 아주 칭찬해. 궁디팡팡
셀프 청첩장 작업을 한달 남짓 해보고 나서 느낀점.
우선 재밌었다. 그동안 앞장포스터를 디자인하고 만들어낸 내공이 쌓여서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고. 그러나 그도 말했지만 사소한 거에 집착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불치병이다. 지나친 디테일병, 쓸데없는 것에 완벽주의병
그리고 내린 결론은, 그냥 무난하게 남들처럼 일반 기성품으로 하는 것이 시간도 에너지도 (경우에 따라) 돈도 아낄 수 있다.
그렇지만 인생의 한 번의 결혼식에, 세상 하나뿐인 청첩장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낸다는 점에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면 해도 좋다.
돈은 비슷하게 드는 것 같다. 아니 제대로 하고자한다면 훨씬 더 들 수 있는게 셀프청첩장. 마음 같아서는 반투명한 트레싱지 봉투를 하고 싶었고, 봉투에 찍는 스탬프 제작도 탐나고, 드라이플라워도 하나씩 꽂고 싶고 아니면 씰링왁스 찍어내는 것이나 등등. 어쨌든 욕심껏 다 한다면 20만원 넘는 프리미엄 청첩장이랑 맞먹을 거다. 하지만 우리는 300매에 총 144,900원이 들었으니 장당 483원. 원래 하려고 했던 기성 청첩장과 별반 차이 없게 만들어냈다. 이만하면 성공적인 셈.
다음주에 인쇄되어 나오면,
그 청첩장이랑 웨딩밴드 가지고서
하프 스튜디오 촬영해야지
[결혼에 대하여 3/3]
다음화는 그러니까 할 생각이 없었던,
그러나 한다면 이곳에서 해야지 했던 그런
스튜디오 촬영에 대한 스토리.
bgm. 엔딩이 뭘까 - 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