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의 시선을 좇아간 충북 옥천으로의 드라이브.
새벽 도시락과 안개 속 드라이브
하루는 일했고
하루는 드라이브 가기로 한 일요일.
'Rrrrrrrrrrrr-'
알람을 듣고 눈이 번쩍 떠졌다.
새벽 네시.
옥천의 일출 시간은 6시 47분.
일출 보기 좋은 용암사까지는 1시간 50분 소요.
늦어도 4시 50분엔 집에서 나서야 한다.
그리고 묵은지김밥과 유부초밥을 싸야 하고.
그러니 무조건 4시에 기상.
알람이 울리자 말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계단을 총총총 내려왔다. 지난밤 예약해둔 밥솥을 열어 밥이 잘 지어졌나 확인부터 했다. 처음 해본 예약 취사에 긴장하고 바보짓도 했는데(그만 아는 것) 다행히도 밥은 잘 지어졌다.
묵은지를 씻어 물기를 꼭 짜 놓고, 캔 하나를 따서 참치에 마요네즈 한 스푼을 넣어 섞고, 밥에는 참기름을 둘러 한 김 뺐다. 그리고 이어서 소금 간 해야 하지 않냐는 그의 말에 소금을 살짝. 묵은지김밥만 하는데 시간이 훌쩍 지난다. 씻고 나온 그에게 유부초밥을 맡겼다. 우여곡절 끝에 도시락은 완성했고 나는 10분 컷으로 씻고 옷을 갈아입고 계획대로 4시 50분에 집에서 나섰다.
친정집에 잠깐 들러 싼 김밥과 유부초밥을 슬쩍 두고 나와 우리는 옥천으로 출발. 1시간 50분 새벽안개 뿌옇게 낀 고속도로를 달렸다. 장윤정, 남진의 '당신이 좋아.' 송대관, 신지의 '사랑해서 미안해.' 주현미, 윤아의 '짜라짜짜' 등의 뽕짝이 라디오에서 잇따라 흘러나왔고 우리는 흥이 돋아 차 안 노래방에서 떠나가라 따라 부르다가 마침내 옥천 용암사에 도착.
구름이 춤 추는 곳, 운무대
주차장엔 제법 차가 많다.
그러나 오르는 길엔 사람이 없다.
고즈넉한 용암사 산사에서 스님만 한 분 마주쳤다.
일출과 운무를 같이 볼 수 있는 운무대 전망대로 올랐다. 예상보다 산행인 데크길을 오르는데... 앗, 뒤에서 붉은 해가 떠오른다. 속도를 내보자 무브무브
마침내 전망대에 다다랐고 일출을 맞이했다. 감격
마치 1월 1일 새해 해돋이를 보러 온 기분. 전망대엔 밤을 지새운 캠핑족도 있었고 몇몇 아저씨 아줌마들이 계셨다. 마스크를 낀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옥천은 아직 확진자가 한 명도 없더니 진짜 청정지역이구나 싶었다. 한참을 출렁이는 파도 같은 운무와 해와 밀림 같은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참 소원도 하나 빌었다. 나는 속으로 빌었지만 옆에서 그는 소리 내 되뇌었는데 들어보니 나랑 같은 내용이었다.
"코로나 종식되게 해 주세요."
배가 고파질대로 고파진 우리는 다시 내려왔고, 차 안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었다. 컵라면이 빠져 아쉬웠지만 그 자리를 대신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채워주었다. 맛있어. 종종 이렇게 도시락을 싸들고 여행 가야겠다.
천연미스트만 잔뜩 쬔 부소담악
다 먹고 부소담악으로 향했다.
부소무니 마을 앞 물 위에 떠 있는 산이라고 하여 '부소담악'이라고 불리는 곳. 암봉들이 병풍처럼 장관을 이루는 이곳을 지난밤 유튜브로 미리 찾아보고 매료되어 기대를 품고 갔다.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불안한 조짐. 뿌연 안개가 가득해 시야가 좋지 않다. 추소정에 올라 아름다운 비경을 보려 했건만 물 위에 암봉은커녕 하늘과 물의 경계도 보이지 않았다. 어찌나 안개가 심한지 속눈썹 사이사이 이슬이 맺혔고 나무마다 가지 끝에는 물방울이 열매처럼 달렸다
옥천찐빵과 옥천초량순대
허무하게 차로 돌아온 후, 원래의 예정은 정지용 생가나 국내 최대 규모 메타세쿼이아 길이 있다는 화인 산림욕장에 가는 거였는데 이대로는 볼 게 없겠다 싶었고 무엇보다 새벽행에 지친 우리는 옥천시내에 가기로 했다. 목적은 생활의 달인에 나온 꽈배기와 찐빵집*.* 하루 세 번 나오고 회차마다 40명 선착순 판매를 하는 곳인데 마침 오전 10시 처음 나올 시간에 맞춰 갔다. 평소라면 엄청난 대기줄이 있을 것 같은데 앞에 단 세 사람만 줄 서 있었고 조금 기다려서 4팩을 구입했다. 그리고 마침 맛집으로 찾아둔 옥천초량순대집이 찐빵집 바로 옆이길래, 이른 아점을 할 요량으로 이끌리듯 들어갔다. 돼지국밥과 순대국밥 하나씩 시켰다가, 이 집 순대를 먹어봐야지 싶어 순대국밥 대신 순대 한 접시를 시켰다.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 성당은 예뻤다.
부린 배를 두드리며 나왔고, 가까이 옥천성당이 있다고 그가 가보잔다. 약국이 6-7군데 밀집되어있는 옥천시내에서 약국마다 줄을 길게 서 있었다. 확진자가 0명인 이곳이 이러면 대구는 오죽하겠나... 공적마스크가 1,500원이나 하는 거나, 몇 시간씩 줄을 서도 빈손으로 돌아가는 사람이나, 본 업무도 제대로 못하고, 사람들에게 좋은 소리도 못 들을 약사들 모두 안타깝기 그지없다 정말. 5분 정도 가다 보니 벽화와 함께 옥천성당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이블루색의 고운 성당. 전주 전동성당도 생각났다. 7년 전 그가 핀란드로 떠나기 전 마지막 군산-전주여행이었지 그때가 아마. 흐렸던 구름은 걷히고 막 해가 떠올라 더 기분도 싱그럽고 성당도 더 예뻐 보였다. 원목으로 이루어진 아치형 문도, 테두리가 원목인 창문도. 단 하나 밤 지새운 듯한 꼬질 해진 내 모습만 빼고.
향수호수길 2킬로
햇살에 힘을 얻어 정지용 생가도 향했다. 그렇지만 코로나로 인해 굳게 닫힌 문. 아쉬워하며 향수호수길을 걷기로. 향수호수길은 옥천이 고향인 정지용의 시 '향수'와 '호수'의 제목을 따서 지어진 생태탐방로다. 전체 8킬로 길이지만 우리는 물비늘전망대까지만 왕복 40분 걷기로 했다. 옥천 8경 중 하나이기도 하고 호수가를 걷는 대청호 산책길이 기대가 컸는데 원래 임도였던 길을 조성한 지 얼마 안 된 건지 울퉁불퉁한 흙길에 경사가 심했다. 오르락내리락 1킬로를 걸어 물비늘전망대에 도착했고. 정지용 시인에게 영감을 주었을 호수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간간이 마주친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 든 아저씨아줌마들이었는데, 커플 패딩에 이어 커플 트레킹화를 신은 중년부부 커플도 보고 우리보나 낫다는 생각을 했다^_^
옥천에 오면 가장 가보고 싶었던 한반도 지형 둔주봉은 차마 오늘 더는 못 가겠다. 오후 두 시, 눈 뜬 지 이미 열 시간째지 않는가. 마치 무박이 일 여행하는 기분. 옥천은 날 좋은 날 다시 올 것을 기약하고 대구로 돌아가기로. 지난주엔 남해 이번 주엔 옥천. 장장 왕복 4시간의 짧지 않은 드라이브 여정을 오로지 나를 위해 기꺼이 감행해준 콩맨에게 정말 고맙다.
p.s. 그래서 다음엔 어디로 데려가줄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