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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밑바닥에서.. 늪에 빠진 자를 위한 회고록

[책 리뷰] 인간 실격(人間 失格) - 다자이 오사무

by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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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빨리 또 쉽게 읽었는데, 다 읽고 리뷰를 쓰려니까 막막해진 책이다.


보통 책을 읽을 때 인상 깊은 문구나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을 탭하여 표시하면서 읽는 편인데, 이 책은 초독할 땐 탭을 거의 안했다가 재독 시엔 나도 모르게 수십 군데 탭을 하게 됐다. 리뷰도.. 계속 제목과 키워드만 뽑아놓고 며칠을 주저하다 이제야 써본다.


사실 정말 간단히 평하자면 한 두 문장으로도 끝날 수 있는 책이다. 의지박약의 나약한 인간, 갱생 안되는 한심한 인생, 중독자의 최후 등 스토리만 보자면 아주 흔하디 흔하다. 그렇지만 책의 제목인 '인간 실격'과 첫 장에서 언급된 사진 3장은 주인공의 삶을 상징하고, 이야기를 촘촘하게 뜯어보면 주인공인 '요조'라는 인물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며 인간적으로 짠한 마음, 측은지심까지 들게 된다. 인간의 불완전함과 나약함.. 삶이라는 굴레가 애처롭게 느껴진다. 계속 여운이 남고 참 묘한 책이다.


요조는 부잣집 정치인 아버지 밑에서 막내 아들로 자랐는데, 몸이 약해 제 역할을 못한 어머니와 강압적인 아버지 밑에서 '익살꾼'으로 자아를 형성해나간다. 어린 시절 하녀, 시종들에 의해 성범죄를 겪었고 이는 익살꾼이라는 그의 가면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나의 진짜 생각과 마음, 상처를 숨기고 실없는 사람으로 주변을 웃기는 캐릭터로 자신을 비춘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과 명석한 두뇌, 매력있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형성된 자아관은 평생 그를 절망의 늪으로 빠뜨린다.


분명 여러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운명은 참 가혹하다. 단순히 의지가 부족해서라고 치부하기엔,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겪은 사람이면 충분히 요조의 삶에 동정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학창시절 그를 유일하게 알아봤던 친구 '다케이시'가 첫 번째 기회였다. 모두를 속이고 있던 요조는 그를 꿰뚫어본 다케이시를 두려워했으나 자신의 정체가 그로 인해 탄로날까봐 감시할 목적으로 그와 친해지게 된다. 그는 요조에게 너는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고, 여자들을 많이 만나게 될거라는 두 가지 예언을 하게 된다. 전자는 빗나갔지만 후자는 맞았다. 요조는 다케이시로 인해 본인만의 '도깨비식 화법'으로 내면의 모습을 담은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이후 그림은 분실되고 다시는 찾지 못한다.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만나게 된 악우 '호리키'를 따라 방탕하고 퇴폐적인 생활을 하게 된 요조.. 우연찮게 들어가게 되어 비합법적 정치 운동에도 참여하게 됐지만 본인의 의지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이름 모를 창녀들과 어울리다가 우연히 '쓰네코'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다케이시 이후 요조가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일 수 있는 두 번째 사람이었다. 그러나 함께 자살 시도를 한 후 그녀만 죽고, 요조는 살아난다.


그런 큰 사건을 겪은 후 요조는 피폐해졌고, 아버지의 심부름꾼이자 학교 보증인인 '시부타' 일명 넙치를 따라 그의 집에 얹혀 살게 된다. 감옥에 갇힌 듯이 살다가 넙치의 신중한 척 돌려 말하기에 휘말려 묘하게 일이 틀어져 요조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꼬이기 시작한다. 결국 요조는 가출을 하고 호리키를 찾아간다.


호리키네 집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시즈코라는 여자의 집에서 처음으로 정부 생활을 시작하게 되고, 그녀의 딸 시게코는 그를 아빠처럼 따르게 된다. 요조는 마시다 만 한 잔의 압생트와 같은, 지금은 분실된 자신의 걸작인 자화상을 회상하지만.. 현실은 큰 기쁨도 슬픔도 못 느끼는 무명 화가로 여자 집에 기생하며 살고 있다. 침울과 불안감, 불만족은 그를 술꾼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래도 이 때만 하더라도 본인의 처지를 직시하고자 하였고,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은 나의 의지대로 행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빠가 되어달라는 시게코의 말에 '불행한 기벽(타인을 두려워하고 자기를 좋아해주면 더 멀어져야만 하는)'이 발동하여 요조는 그 집을 나오게 된다.


이후 교바시 스탠드바 마담을 거쳐 요시코에 정착하게 된 요조. 그는 처녀성의 숭고함을 가진, 나를 순수하게 덮어놓고 믿어주는 그녀와 결혼하며, 차차 인간다운 존재가 되어 비참하게 죽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희망을 가지고 새출발을 하게 된다. 금주를 하고 성실하게 생활했지만 호리키를 다시 만나게 되면서 방탕한 생활이 다시 시작된다. 그러다가 요시코의 겁탈을 겪었고, 그의 유일한 믿음과 희망이었던 그녀의 순진무구한 신뢰.. 그 상징이 더럽혀지면서 이후 예의 불안과 공포가 심화된다. 호리키와 했었던 비극 대 희극 명사 놀이에서 생각해낸 '죄와 벌' 처럼.. 요조는 '신뢰가 죄인가요? 무구한 신뢰심은 죄의 원천인가요?' 라고 자문하며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여 자살 기도를 한다. 깨어난 그는 요시코와 헤어지겠다고 결심한다.

각혈.
더럽혀지지 않은 눈을 양손으로
쓸어 담아 얼굴을 씻으면서 울었습니다.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지?
여기는 어디의 샛길이야?

내 불행은 모두 내 죄에서 비롯된 것이고
끝도 없이 점점 더 불행해질 뿐
막을 수 없다.




몸과 정신 모두 피폐해진 요조는 이후 목다리를 짚은 약방 부인을 만나게 된다. 그와 그녀는 그들을 끝없이 침잠시키는 불행에 서로 공감하며 눈물을 흘린다. 또 마치 혈육같은 존재라고 느낀다. 하지만 약방 부인은 술로 불행해진 자신의 트라우마로 인해 그에게 술 대신 모르핀을 권했고, 급속도로 모르핀에 중독된 요조는 결국 넙치, 호리키, 요시코에 끌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이제 저는 죄인은 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폐쇄 정신병동이었다. 그는 인간이길 거부당했고 인간이길 포기한다. 그의 첫 세계였던 아버지마저 죽고 진정한 폐인이 되어 모든 의욕, 고뇌할 능력조차 상실하였다. 반강제로 시골에 보내져 요양 생활을 하게 된 요조는 그를 돌보는 늙은 식모에게마저 겁탈 당하며 영혼 없이 껍데기로만 존재한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

지금까지 제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책의 마지막 장 <후기>에서 교바시 마담의 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에요.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어요.



'인간 실격(人間 失格)'


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 세상을 의미한다. '격'은 주위 환경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품위이다.


타인에게 맞춰진 삶이었고, 그 누구보다도 이타적이었던 요조. 나를 없애면서까지 자신의 의견을 군중의 것으로 포장한 사람. 소설의 첫 장, 남자의 사진 3장에서 첫번째 사진은 요조의 어린 시절 '익살꾼'의 모습을 담고 있다. 어딘가 기괴한 웃음.. 그건 두번째 청년기의 사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타인을 위한 어릿 광대였고 친구나 여자 등 타자에 의해 끌려다니는 삶이었다. 진짜 그의 모습을 처음으로 알아봐주었던 다케이시를 만나게 됐을 때, 그 때가 유일한 기회였을까? 요조는 도깨비식 화법으로 그린 자화상을 잃어버리지 말았어야 했다. 또 화가가 되었어야 했다.


어린 시절 강압적인 집안과 범죄의 피해자로 그는 자기 자신을 숨기고 익살꾼을 자처했다. 자아가 미처 형성되기도 전에 세상이 '나'인, 즉 일명 '다자이 메소드' 라 불리는, 타자와 세계가 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애초에 진짜 나만의 '자아', '정체성' 이란 게 만들어지지 못한 게 아닐까?


그는 익살꾼에서 죄인으로.. 죄인에서 미치광이로 취급받았다. 그가 느낀 '인간 실격'은 자기 정체성이 뚜렷한 '나'를 잃어버린 게 아니라 타인을 위한 광대, 인형과 같은 삶이었던 자아(라고 부르기에도 미미한)를 박탈당한 것이었다. 그것밖에 없었던, 그게 그의 유일한 자아였는데 그것마저 빼앗긴 요조는 정말로 빈 껍데기만 남았다. 한번이라도 주체적인 삶을 살았더라면 이렇게까지 비극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지막 세번째 사진에는 익살꾼의 괴기한 자아상마저 상실한 얼굴이 담겨 있다. 사람의 형상을 하고는 있으나 완전히 텅 비어버린 모습. 그 기이했던 타인을 위한 웃음마저 없어진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은 모습.


책의 마지막 구절인 교바시 마담이 남긴 말이 요조의 일생을 상징한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나쁜 거라고.. 요조의 아버지는 그의 강압적인 세계였고, 그를 익살꾼이 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첫 번째이가 전부였던 세상이었고 타자였으며, 완전히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았던 그는 어찌보면 '아주 순수하고 자상하고.. 하느님처럼 좋은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는 주체적으로 살 수 있었을까? 아버지와 집안을 무서워하면서도 부끄럽게 생각했던 요조. 하지만 그게 요조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죽음은 그에게 고뇌할 의지조차 앗아갔다.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데카당스 문학, 무뢰파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당시 제국주의, 군국주의라는 이름 하에 나라를 위한 '가미카제'로 희생됐던 젊은이들은 요조처럼 세계가 곧 자신이었다. 그러나 패전 후 자신의 전부, 삶의 목적을 잃었고 만연하게 된 허무주의 속에서 쇠락, 퇴폐, 자기 파멸적인 문학과 예술이 자리잡게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작품에 공감했던 건 비단 이들 뿐만이 아닐 것이다. 그의 작품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도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넨다.


'인간 실격'은 다자이 오사무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자전적 소설이다. 여러 번의 자살 시도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그는 '인간'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인생 후반에 안정을 찾고 기독교 이론에 심취하였으나 그를 옥죄어 온 틀을 깨지 못했던 것이었을까. 늪에 빠져버린 삶을 의지가 나약했다는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비록 요조와 그는 파멸의 길을 갔지만 이 작품은 계속 살아남아 우리에게 심심한 위로와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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