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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순수한 사랑의 가능성

[책 리뷰]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프랑수아즈 사강 저

by 나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39세의 실내 장식가 폴에게는 6년 만난 약혼남인 로제가 있다. 그녀는 우연히 의뢰인의 아들인 시몽을 만나게 되고, 14세 연하인 시몽은 폴에게 반해 구애를 한다.


아직 신출내기 변호사인 시몽은 폴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아래와 같이 이야기한다.


저는 당신을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고발합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행복해야 할 의무를 소홀히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에게는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지만, 그 대신 고독 형을 선고합니다.


또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이 같이 있어야 한다며 함께 산책을 하고, 이후 그는 그녀를 연주회에 초대한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의 편지 문구에 폴은 처음에는 미소를 지었지만, 이내 깊은 생각에 잠긴다.


요즈음 그녀는 책 한 권을 읽는 데 엿새가 걸렸고, 어디까지 읽었는지 해당 페이지를 잊곤 했으며, 음악과는 아예 담을 쌓고 지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 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 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폴의 오랜 연인인 로제는 ‘자유’라는 이름 하에 하룻밤 상대인 여자들을 만나고 다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폴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애써 모르는 척한다. 하지만 오래된 권태는 그들의 관계에 균열을 내고 있었고, 결국 폴은 시몽과 만나게 된다.



25살의 시몽은 젊고, 잘생겼고, 부잣집 아들래미라 일 안해도 먹고 살 지장 없는 변호사에, 열정적이며, 무엇보다 폴에 대한 사랑이 맹목적이다. 누구와 달리 딴 짓도 하지 않고 로제를 향한 폴의 감정마저도 받아들인다.


시몽은 폴에게 주저없이 이야기한다.


난 지금 당신과 함께 있어서 무척 행복해.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그 이상이야. 난 당신도 나와 함께 있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당신은 우리의 사랑을 우연한 것이 아니라 확실한 그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해. 내가 그렇게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당신보다 먼저 세상을 살진 않았지만, 앞으로 당신이 없는 세상에선 살고 싶지 않아. 당신은 내 인생의 여인이고, 무엇보다도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나는 알아. 당신이 원한다면 내일이라도 당신과 결혼하겠어.


당신은 나보다 열네 해를 더 살았지만, 나는 현재 당신을 사랑하고 있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당신을 사랑할거야.


폴은 자신도 모르게 시몽에게 빠져들었지만, 이내 그에게 나는 당신을 힘들게 할거라고, 당신에게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다고, 내가 두려워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내 자신이라고, 또 너를 무척 힘들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시몽과 가까워질수록 폴은 그가 일에도 소홀하고 자신만 기다리는 모습에 실망을 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로제에 대한 마음도 정리를 하지 못하며 갈팡질팡한다.


그녀로서는 그들 두 사람의 삶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럽고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바로 그 자존심이 그녀 안에서 시련을 양식으로 삼아,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로제를 자신의 주인으로 선택하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제는 그녀에게서 언제나 빠져나갔다. 이 애매한 싸움이야말로 그녀의 존재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그 싸움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시몽의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듯이 이런 삶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을 거라고.


시몽은 그녀의 표현대로 ’마음의 현(絃)‘을 울리는 사람이다. 그는 그녀를 들뜨게 하고 웃게 한다. 그의 순수한 열정과 맹목적인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움직인다.


하지만 폴은? 로제와 잠깐 조우한 이후 그녀는 시몽이 잠든 모습을 바라보면서 젊은 자신이 자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이후 로제를 만나고 그의 익숙함에 안도하면서도 길을 잃은 느낌을 받는다.


결국 그녀는 시몽과 이별을 택하고, 힘들어하는 시몽을 안아준다.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 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 속에 있는 그가 부러웠다.


… 시몽, 이제 난 늙었어. 늙은 것 같아…
하지만 시몽은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는 두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층계를 달려 내려갔다. 마치 기쁨에 뛰노는 사람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는 스물다섯 살이었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거기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일 때문에 늦을 것 같다는 로제의 말로 끝난다. 6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로제는
자유를 갈망하며 다른 여자들을 만날 것이고, 폴은 또 기다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녀는 시몽으로 인해 그녀 마음 속의 무언가가 촉발되었고, 로제와 다시 만났어도 길을 잃은 느낌을 받았다. 아마도 로제와는 곧 끝났을 것이다. 익숙함에 기대지 않고 힘들지만 자신만의 삶을 또 살아 나갔을 것이다.


책의 저자 프랑수아즈 사강은 반드시 책 제목을 평서문에 말 줄임표를 넣어야만 한다고 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시몽이 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며 건넸던 말은 물음표가 달린 의문문이었다. 프랑스 사람들에게 브람스는 일반적이지 않은 취향의 음악가이기 때문에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물음은 의례적인 것이라고 한다.


작가는 왜 제목을 저렇게 붙였을까? 폴은 시몽의 물음에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떠올린다. 내가 브람스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도 몰랐다고 그녀는 웃으며 로제에게 이야기했었다. 그 말은 그녀가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것들, 잊고 있던 것들을 갑자기 떠올리게 했다.


책의 제목에서 말 줄임표는 폴이 그 물음에 곰곰이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의미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작가가 독자에게 ‘브람스를 좋아하라구요!’ 내지는 ‘브람스를 좋아해보는 게 어때요?’ 라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명령조나 청유형으로 들리기도 한다.


실제로 브람스는 자신보다 14살 많았던 클라라 슈만을 평생동안 뮤즈로 삼았다고 한다. 작가가 담고자 했던 ‘브람스’의 의미는 내 자신, 그냥 살아져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는 무엇일 것이다.


그렇다면 폴은 왜 시몽과 헤어졌을까.

그녀는 이미 여러 번의 결혼과 이혼, 연애와 이별을 경험해왔다. 기대와 실망, 실패의 경험, 그리고 지나간 시간들은 그녀가 ‘브람스’를 까마득히 잊고 지내게 만들었다. 그런데 시몽은 이제 갓 태어난 아기처럼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맹목적이다. 이미 너절해진 그녀에게 시몽은 한 줄기 빛이고 희망이고 열정이었지만, 그를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도 두려웠을 것이다.


한 때 그녀는 시몽 같은 사람을 만났고 순수함만으로 그와 미래를 꿈꿨던 적도 있었을 것이다. 폴은 시몽에게 너에게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고 너를 힘들게 만들거라고 이야기했었다. 자신이 모든 걸 망칠까봐, 시몽의 순수함마저도 망쳐버리고 상처를 줄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그녀는 헤어짐을 고한 게 아니라 그에게서.. 그를 향한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도망을 친 것이다. 그리고 헤어지는 그 순간에도 그의 순수함을, 아름다움과 열정과 사랑을 동경하고, 그게 변치 않도록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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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를 보니 샤갈의 <생일>이 들어가 있다. 샤갈은 연인 벨라와의 결혼을 열흘 앞둔 자신의 생일에 이 그림을 완성했는데, 벨라와의 열정적인 사랑이 그림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둘은 벨라가 죽기 전까지 30여년을 함께 살았고, 벨라는 샤갈의 뮤즈였다.


샤갈의 그림은 국내 출판사에서 집어 넣은 것 같은데, 책내용을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하다. 폴은 시몽과도 헤어지고 로제와도 끝이 보이는데 표지는 왜??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작가는 사랑은 2년, 길어야 3년이고 사랑은 덧없는 것이라고 후술했다. 그렇지만 제목을 보면 그래도 언제까지고 지속되는 순수한 사랑이 가능할 수도 있지 않냐고 반문하는 것 같다.


작가도, 책 표지를 샤갈의 그림으로 넣은 이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브람스를 좋아할지 말지는 내 선택에 달려 있다. 시몽이 폴에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브람스의 피아노 콘체르토 2곡을 연이어 들으며 책을 읽어나갔다.



두번째 협주곡은 첫번째 곡이 지어진 후 30년 후에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나는 첫번째 곡이 정말 좋았다. 사실 브람스는 내 안중에는 없었는데, 브람스의 곡이 이렇게 좋았는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생각보다 솔직하고 생각보다 격정적이었다.


아마도 폴 역시 브람스의 곡이 이전과는 다르게 들렸을 것 같다. 남자와 사랑의 감정은 불완전하고 날 떠나갔어도 다시 찾은 그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은 앞으로 그녀의 삶을 이끌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다음에는 순수한 사랑에 기꺼이 자신을 맡겨볼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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