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리뷰] 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저
#1
문득 찾아온 한 단어는 ‘시(詩)’가 되었고,
내 삶에 빛을 비춰주었다.
포르투게스!
오랜 세월 학교에서 고전문헌학을 가르쳐왔던 그레고리우스는 우연한 계기로 홀연히 리스본행 열차를 타게 된다. 포르투게스, 지금까지 갈 수 없는 나라에 있는, 마법에 걸린 보물 같았던 그 단어를 찾아 그는 문을 열고 길을 나선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가 쓴 책 ‘언어의 연금술사’를 길잡이 삼아 그의 흔적, 그리고 본인의 과거와 내면을 쫓기 시작한다. 기차가 도착하고 프라두의 중심에 점점 다가가면서 조금씩 포르투갈어를 배워나갔다.
그리고 단 하나의 단어.
프라두는 다이아몬드와 같은 ‘투명한 본질’에서 바로 나오는 느낌을 주는 ‘원형(原形)’, 신의 말, 언어의 연금술사가 엮은 시라고 하였고, 그레고리우스는 세상의 모든 수평선 저편에 있는 밀물보다도 더 강하고 더 투명하게 빛나는, 바다가 손댈 수 없는 먼 곳에 있는 단어라고 하였다.
둘은 그 단어를 찾아간다.
프라두에 대해 알게 될수록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의 삶의 장면들을 되돌아보며 그것들을 프라두가 남긴 퍼즐과 함께 맞춰나가게 된다.
인간의 경험과 사고, 감정들, 그를 둘러싼 세계.
삶과 죽음, 그리고 의미...
날카로운 탐조등과 같았던 아들에 대한 두려움을 굽은 등 안에 숨긴 채 억압으로 일관했던 아버지, 그리고 교묘하고도 우아하게 본인의 기대감으로 아들을 바라봤던 어머니. 프라두의 첫 세계가 그를 만들고 그를 죽였다. 그렇지만 나만의 세계는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여정에서 함께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축복이지 않을까. ‘신의’의 관계라 생각했던 조르지, 플랫폼에 서 있는 천사였던 마리아 주앙, 그리고 그의 사랑이었던 에스테파니아...
프라두는 맹지스를 살렸고, 저항 운동에 뛰어들었다. 그의 육체는 결국 바스러졌지만 정신은 언어로 남았다.
그레고리우스는 긴 여정 끝에 ‘세상의 끝’인 ‘피니스테레에 이른다. 그는 그곳 바다에서 만난 어부들에게 삶이 만족스러운지 물었다. 불합리함과 피로, 과장된 쾌감과 경계를 넘어서는-지금까지 모르던- 해방감이 섞인 이 상황을 그는 한껏 즐겼다.
“만족하냐고? 다른 삶은 모르는 걸!”
어부들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나중에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바다로 변했다. 그레고리우스도 얼마나 흥겹게 따라 웃었던지 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계속 직진! 오로지 직진! 아무것도 없어요!”
그레고리우스는 그곳에서 여러 단어들 가운데 단 하나의 언어를 찾았다. 그 단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떠오르진 않았지만 온 우주의 단 하나의 단어가 그것이라는 걸 확신했을 것이다. 계속 그를 맴돌았지만 떠오르지 않았던 호메로스의 단어는 리스트론, 바닥 청소할 때 쓰는 쇠꼬챙이였다.
작가는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우리는 인생이 불완전한 상태로,
토르소로 머물 것이라는 공포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삶의 시(詩)가
우리를 지탱해줄거라고.
인생의 끝, 세상의 끝에서 찾게 될지도 모르는 ‘그 단어’를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서, 우리는 모든 각자의 불안과 슬픔과 실망과 삶의 피로가 완벽히 각자의 것이라 각자에게만 해당하는 외로움을 만든다 해도, 우리는 웃음 속에서 긴밀히 연결될 것이라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부분과 또 다른 가능성, 나와 타인과의 간극, 그 불완전한 부분은 우리의 마지막 성소, 상상력이며 그것은 우리 삶에 색깔을 입혀주고 멜로디를 주는 아름다운 시가 될 것이라는 것.
길고도 짧은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마치 영원히 박제된 흑백 사진과도 같았던 그의 긴 인생, 그의 죽어있던 단어들은 시(詩)가 되었고, 거기에서 나오는 빛은 삶의 장면들에 다채로운 색깔을 불어 넣어 줄 것이다.
#2
그리고.. 내 개인적 삶에서의 의미
책의 내용과 그 속에 담긴 의미는 매우 명확했고, 마음에 와닿는 글귀도 많았지만.. 그걸 거울삼아 내 삶을 반추해보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어느 날 갑자기(인 것처럼 보였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을) 기차를 타게 된 그레고리우스처럼 누구에게나 평생에 적어도 한 두번은 삶에 있어 큰 변혁이 있기 마련이다.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인데.. 지금 생각해보면 성인이 되기 전 애벌레에 불과했던 날 깨워주었던 이를 만났고, 나만의 날개를 펼쳐나갔던 것 같다.
이후로는 사회에 적응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정체된 상태로 머물렀었다. 날지 않았던 건지, 못했던 건지는 모르겠다. 잊어버리기도, 또 억지로 누르기도 했어야 했다.
어릴 때는 그저 진리를 찾고 그걸 그림으로 표현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이후 신의 말인 ‘그 단어‘를 찾았고 확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점점 잊혀져 갔고 굳이 찾지 않았다. 지금은?
나는 여전히 완전함이 있다는 걸 확신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함 속에서 저마다의 생각으로 살아간다. 나 역시 마찬가지.. 하지만 미완이기에, 불완전하기에 더 아름답다는 것도 안다.
어둠 속에서 어느샌가 색을 잃어버렸던 내 삶에 다시 한번 한 줄기 빛이 드리워졌고, 이 여행의 끝이 어디일지 또 무엇을 마주할지는 모르지만 찾아나가는 걸 멈추지만 않는다면 내 인생이 다시 여러 색들로 채워질 것임을 알고 있다.
또 그것만이 내 삶을 벅차게 만들 것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