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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세은 Aug 15. 2021

[재창작] 날지 못하는 집오리들의 메시아

안데르센 동화 <미운 아기 오리> 재창작 소설

시골 농장의 여름밤은 느지막이 찾아왔다. 어둠이 내릴 때쯤 건초더미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한 어린 수컷 오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마치 모두가 잠드는 이때를 오래도록 기다렸던 것처럼.


- 백조의 알을 훔쳐와야 해.

어린 수컷 오리는 오늘 아침 농장 동물들의 대장격인 늙은 오리로부터 중대한 사명을 전달받았다.

- 얘야, 우리 집오리들은 이대로면 언제까지고 이 농장에서 탈출할 수 없어.

- 우리는 철새들처럼 날아오를 수 없으니까요.

- 우리가 나는 법을 잊어버린 건 농장의 못된 인간들 때문이지. 우리는 나는 힘을 되찾아야 해.

늙은 오리는 이 시기 주변 연못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백조무리에게서 답을 찾았다. 오리보다 몸집이 크고 수만 킬로를 이동하는 백조의 새끼를 관찰하면 나는 법을 잃어버린 집오리들이 나는 비결을 터득하게 될 거라는 계획이었다.     

몸이 바짝 마른 어린 수컷 오리는 갓 태어난 새끼오리나 빠져나갈 수 있을까 말까 한 울타리의 작은 구멍에 몸을 집어넣고 엉덩이를 흔들었다. 깃털 몇 개가 뽑혀나가고야 농장 밖 땅을 밟게 된 어린 수컷 오리는 명령대로 근처의 연못에서 오리의 알 하나를 훔쳐왔다. 그리고 그것을 농장에서 막 알을 낳은 집오리의 둥지에 섞었다. 이튿날 어미 오리는 자신이 낳은 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지만, 정성스럽게 그것을 품었다. 자신의 둥지에 흘러들어온 것은 뭔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에서 깨어난 새끼오리들 틈에서 단연코 새끼 백조는 눈에 띄었다. 샛노란 털과 부리를 가진 새끼오리들과 달리 시커먼 잿빛의 털과 부리를 가지고 있었고 몸집이 훨씬 컸기 때문이다. 늙은 오리는 농장의 오랜 관습대로 태어난 새끼들에게 한 마리씩 이름을 붙여주면서, 새끼 백조에게는 ‘메시아’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리고 모든 오리들이 새끼 백조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를 따라 하게끔 했다. 이제 막 태어난 새끼 백조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농장 집오리들의 구세주로서의 사명을 짊어지게 됐다.    


새끼 백조 메시아는 무럭무럭 자랐다. 자라면서 점차 자신이 농장의 다른 오리들과 다르다는 것을 또렷이 깨달았다. 그러나 농장에는 염소와 닭, 당나귀도 있었으므로 생김새가 다른 것은 크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괴로운 것은 모든 오리들이 자신을 온종일 따라 하며 숭배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어느 쪽으로 부리를 털고, 아침마다 어느 쪽 날개깃을 먼저 정돈하는지까지 모두에게 화제가 됐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숭배해 따라 하면서도, 정작 가까이 다가와 친근한 말 한마디 거는 녀석이 없었다. 메시아에게 친구는 없었고, 원치 않은 팬들만 존재할 뿐이었다. 메시아는 자신도 똑같이 수영을 좋아하고, 당나귀의 뒷발질이 무서우며, 지는 석양에 졸음이 밀려오는 평범한 농장의 아기새라는 것을 그들이 알아줬으면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메시아는 날개뼈가 점점 커지고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졌다. 하루에도 몇 번씩 겨드랑이가 간지러워서 날개깃을 파닥거렸다. 잿빛이었던 솜털이 빠지고 풍성한 하얀 털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제 메시아께서 날아오를 때가 된 거야!”

늙은 오리가 그렇게 외치자, 모두들 메시아를 바라보며 시끄럽게 꽥꽥거렸다.

“자, 메시아여. 우리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 주시오!”

“나는, 나는….”

그저 날개뼈 안쪽이 간지러워서 파닥인 것뿐이라고 말했지만, 메시아의 목소리는 커다란 환호성과 메시아를 따라 깃을 치는 오리들의 소리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메시아는 자신을 키워준 엄마에게 가서 자신만 날개가 점점 더 부풀고 있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어미 오리는 메시아에게 말했다.

“너는 사실 오리가 아니라 백조란다. 농장의 집오리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온 우리의 희망이지. ‘메시아’란 구세주를 의미하는 말이란다.”

메시아의 귀에 ‘희망’이니 ‘구세주’이니 하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내가 오리가 아니라니. 내가 백조라니. 그럼 나의 진짜 부모는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요?”

“농장에서 가장 몸집이 마른 수컷 오리가 너를 건너편 연못에서 훔쳐왔어.”

“엄마도 그걸 알고 있었군요. 날 자식으로 생각하긴 했나요?”

“그럼, 너는 소중한 내 아들이지. 그러나 메시아야. 너는 이곳 집오리들의 유일한 희망이기도 해.”

어미 오리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이곳이 끔찍해서 건너편 연못으로 가고 싶다고 한다면 엄마는 허락할 건가요?”

“모두들 너를 아꼈어. 그런데 그걸 끔찍하다고 하다니.”

“엄마, 나는 그냥 평범해지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거 알아요? 이 넓은 농장에서 나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어요.”

어미 오리는 메시아의 커다란 날개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제 와서 평범한 오리의 삶을 살고 싶다는 거니? 그렇게 훌륭한 날개와 커다란 몸을 가졌으면서? 모든 집오리들의 부러움을 사는 네가? 이 농장은 바깥세상에 비하면 아주 좁디좁단다. 집오리들은 이제 자유로운 들오리가 되고 싶어 해. 네가 그 방법을 알려 줄 거라 모두들 믿고 있어.”     

하지만 얼마 후, 오리들은 메시아가 더 이상 자신들의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백조를 따라 하려 해도 오리는 백조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메시아는 이제 꽤 능숙하게 건초더미 위를 날아다닐 수 있었지만, 그 어떤 오리도 자신의 키높이 이상은 날아오를 수 없었다.     

“사기꾼! 가짜 메시아!! 가짜 오리!!”

오리들은 태도를 바꿔서 메시아를 비난하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특별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자라온 형제오리들의 괴롭힘이 가장 심했다. 메시아는 모두를 자신의 가족들이라 믿어왔기에 그 괴롭힘을 견디는 것이 더욱 힘들었다. 결국 자신의 곁에는 어미오리 외에는 가까이 오지 않게 됐고 철저히 혼자 남겨졌다.

늦은 밤 울고 있는 메시아에게 다가와 어미오리가 말했다.

“차라리 건너편 연못의 백조 무리로 날아가렴. 그들은 너를 받아줄 거야.”

하지만 메시아는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해준 어미오리를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때, 건초더미에 버려진 오래된 보자기가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몸집이 작은 엄마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해가 뜨기가 무섭게 메시아는 보자기로 어미오리를 감싸 묶어 고개만 내밀게 하고는 보자기의 매듭을 입에 물고 날기 시작했다. 커다란 날개로 그렇게 높이 날아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다행히 엄마와 함께 농장 울타리를 뛰어넘어 날아오를 수 있었다.

“엄마,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지만 엄마 혼자는 구해낼 수 있었어.”

무사히 건너편 연못에 도착한 어미 오리는 크게 감격했다. 하지만 철새인 백조의 무리들 틈에서 스스로 멀리 날 수 없는 집오리 혼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메시아는 백조의 무리들에게 다가가 도움을 청했다. 저기 농장에는 나는 힘을 잃어버린 집오리들이 탈출을 꿈꾸고 있다고. 내가 어미 오리를 데리고 탈출한 것처럼, 모두가 한 마리씩 여기로 데리고 나와줄 수 없겠냐고.

“너는 우리의 동료니까 도와줄 수 있어. 그런데 그들도 또한 너의 동료가 확실하니? 너에게 잘 대해줬어?”

백조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렇게 진지한 눈빛으로 메시아에게 물었다.

거짓말로도 잘 대해줬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자신을 진짜 부모에게서 훔쳐냈으며, 친구나 형제로 여겨주지도 않았다. 멋대로 숭배했다가 멋대로 비난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의 유일한 가족이자 동료였다.

“내가 미움받았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을 대하고 싶지 않아요. 그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어요. 남을 동경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아무런 이유 없이도 아껴줄 수 있다는 것을요.”

백조오리의 우두머리는 그 대답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새 동료가 된 어린 백조의 등을 부리로 툭툭 두드려 주었다.

“그래. 그렇다면 우리 백조들이 어리석은 집오리들에게 가르침을 주도록 하지.”

백조떼가 일제히 연못에서 날아올라 농장으로 향했다. 막 잠에서 깨어난 집오리들은 하늘을 하얗게 뒤덮은 백조들을 보고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건초들을 엮어서 몸에 감도록 해요!”

메시아가 농장의 집오리들을 향해 외쳤다.

“오, 메시아! 메시아가 우릴 구하려는 거야!”

“내 이름은 메시아지만, 여러분의 메시아로 태어난 것은 아니에요.”

백조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들에게 말했다.

“그저 우리들의 작은 친절이 여러분에게 깨달음을 주기를 바랍니다.”

백조 우두머리가 하늘 높이 부리를 쳐들어 신호를 보내자 나머지 백조들이 건초로 몸을 단단히 묶은 오리를 한 마리씩 입에 물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먼저 건너편 연못에 도착했던 어미오리가 작은 집오리를 한 마리씩 입에 물고 이쪽으로 날아오는 백조 떼의 광경을 바라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우리들이 숭배한 것은 그저 한 마리 평범한 백조였을 뿐이지만,
결국 우리들을 구해낸 것 또한 평범한 한 마리 백조였을 뿐입니다.
 


<작가 노트>

왜 오리의 둥지에 백조의 알이 섞여 든 것일까. 만약 미운 아기 오리가 우연이 아닌, 계획적으로 납치된 거였다면 하고 상상해봤다. sns와 인터넷 상에서 수많은 우상들이 멋대로 탄생했다가 추락하는 것을 보면서 남과 다르다는 것은 축복일까 재앙일까 생각했었다. 그저 모두를 저와 똑같고 평범한 존재로 생각하면서도 그 평범함이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해낼 수 있는지를 깨닫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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