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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11. 2022

힘들 때 보려고 모아둔 풍경들

왠지 찡하고 애틋했던 순간들에 관한 짧은 기록


# 풍경 하나

엊그제 산책 겸 커피나 한 잔 할까 해서 동네 카페로 마실을 나갔다. 집 근처 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작은 카페였다. 그동안은 코로나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방문 시간대 때문이었는지 한적했는데, 그날은 어쩐지 사람이 많아 주문이 밀렸다. 예전 같으면 아 오래 기다려야 하나 싶어 마음이 들썩였을 텐데, 지금은 주문이 밀려도 카페가 잘 되는 모습을 보는 게 오히려 좋았다. 내 앞에 먼저 오신 50대 여성 한 분이 한참 기다린 끝에 주문을 마쳤다. 아메리카노 한 잔, 따뜻하게, 원샷만, 머그잔으로(어쩌다 보니 상세하게 기억하게 된 주문 내역). 나는 주문 직전 마음을 바꾸어 차가운 녹차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진동벨을 들고 한쪽 구석에 서서 카페 인테리어 구경도 하고, 몇 권 없지만 책장에 꽂힌 책들도 훑어보았다. 음료가 나오는 데 이전보다 확실히 오래 걸린다. 야외 테이블에 앉은 단체 손님 주문이 많은 것 같았다. 뭐, 급할 것 없지. 조금 더 기다린 후에 드디어 내 앞 손님의 것으로 추정되는 음료가 나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나왔습니다!


직원이 목청을 높여 손님을 호출하고 나는 곧 내 차례라는 생각에 금세 들떴다(쉬운 사람). 오! 드디어 내 차례로군! 그런데 두다두다 달려온 손님이 어째 아까 그분이 아닌 것 같았다. 어? 아직 아닌가? 직원은 호출만 하고는 바로 다음 음료 제작에 들어갔는데 그사이 달려온 손님이 아메리카노를 들고 갔다. 음, 아직인가 보네. 눈길을 아직 거두지 못하고 있는데, 조금 뒤 반짝이는 진동벨을 들고 내 앞에 섰던 50대 여성이 나타났다. 하지만 픽업하는 곳에 있던 따끈한 커피는 이미 다른 분에게로 간 후였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직원이 몹시 당황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앗! 하고 나도 덩달아 긴장.


따뜻한 아메리카노 나왔다고 해서 왔는데요?


그분이 의아한 얼굴로 진동벨을 내밀었다. 멀리 저 편의 야외 테이블을 잠시 살피던 직원은 여전히 당황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다른 분께로 먼저 나간 것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손님. 얼른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 앳된 얼굴의 직원은 무척이나 빨개진 얼굴로 재빨리 머그잔 하나를 다시 꺼냈다. 음, 역시 그랬군. 그렇다면 잘못 들고 간 저분도 원샷의 연한 커피를 드시는 건데 이래저래 꼬였구만... 이런 생각을 거듭하며 상황을 보고 있었다. 괜히 크게 탓하시면 어쩌지. 뉴스에서 어쩌다 보도되는 소위 진상 손님들의 말도 안 되는 행위들이 머리에 남아 있었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머, 그랬군요. 아유 괜찮아요. 천천히 하세요. 천천히.


그분은 분명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뒤에 서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었지만,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목소리에도 표정이 있다. 부드럽고 환한 목소리. 활짝 웃는 목소리. 그 순간 마음의 긴장이 탁 풀렸다. 나도 모르게 마스크 속에서 활짝 웃었다. 너그러이 시간을 지나는 사람이구나, 저분은. 팽팽하게 당겨진 시간도 부드럽게 풀어낼 줄 아는 사람이구나. 봄 같은 사람.



# 풍경 둘

집 근처에 기다란 천변이 있다. 잔잔히 흐르는 천을 따라 윗동네 아랫동네로 제법 길게 이어진 산책로는 운동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그래서 늘 걷거나 뛰거나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사람들로 붐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였지. 아직 4월이었던 어느 한적한 평일 오후에 산책이나 할까 해서 나선 길. 휘적휘적 걸으며 꽃도 보고 하늘도 보다가 우연히 반려견을 산책시키러 나온 60대 정도의 남성 두 분을 보게 되었다. 한 분은 윗동네에서, 다른 한 분은 아랫동네에서 반려견을 따라 죽 걸어오신 듯 뚜벅뚜벅 열심히, 또 얼마간은 무심히 총총총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두 분 다 갈색 푸들을 데리고 나오셨는데 이 친구들이 얼마나 재기 발랄하고 유쾌한지! 멀리서부터 서로를 발견하고는 양쪽에서 냅다 우다다다 신나고 반갑게 뛰어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근엄하게 걷던 두 분.


어어어~~~

엇~~~


자신만의 보폭으로 뚜벅뚜벅 걷던 두 분이 얼결에 같이 우다다다 뛰어와 결국 푸들들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원래부터 아는 사이는 아닌 것 같았는데 그럼에도 푸들 둘은 서로가 반가워서 꼬리를 흔들고 냄새를 맡으며 어쩔 줄 몰라했다. 오! 매우 귀엽군! 나는 멀리서 이 광경을 보자마자 두 눈을 반짝이며 걸음 속도를 부러 늦추기 시작했다. 천천히 천천히... 안 본 척, 못 본 척... 하지만 눌러쓴 모자의 챙 너머로 열심히 흘끔댔다. 보통 반려견들끼리 인사를 하면 주인도 살갑게 한두 마디쯤 건네기 마련이다. 몇 살이에요? 이름이 뭐예요? 아이고, 너 아주 아가구나! 어머, 우리 애가 훨씬 언니네! 등등. 같은 주인(즉,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가 왠지 쑥스러우면 괜히 자신의 반려견에게 말을 시켜 보기도 한다. 얘, 루루야 인사해야지! 초코야, 너보다 훨씬 동생이야! 등등. 그런데 두 분은 얼결에 우다다다 뛰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이런 경우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인싸 강아지들일까?) 줄을 길게 잡고 멀찍이 서 계시다. 눈길도 두 강아지가 뒤엉켜 반가워하는 모습에만 무뚝뚝하게 꽂혀 있다. 푸들 친구들끼리는 여전히 신이 나서 빙글빙글 헥헥 난리가 났는데, 정작 주인들은 그 모습을 마치 모아이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기만 하다니! 푸훗.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왠지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것.  


아, 오후에 좀 쉬려고 했는데 산책을 나가자고 보채는 강아지. 귀찮은 마음도 조금 든다. 하지만 누워만 있자니 초롱초롱한 눈빛이 눈에 밟혀서 혹은 다른 식구들의 핀잔 어린 등쌀에(아 얼른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와요 운동도 좀 하고) 대충 편한 옷을 걸치고 산책에 나서 본다. 걷다 보니 또 나름 상쾌하다. 멀리 우리 강아지와 같은 종의 아이가 뛰어온다. 어어어~~ 좋아하니까 일단 멈춘다. 이 시간이 어색하고 불편한 감이 없지 않지만 강아지들 인사가 끝날 때까지는 기다려야지... 얘야, 대충 인사 끝났으면 얼른 또 가자. 아직 갈 길이 멀다구.


두 분의 머리 위로 거대한 말풍선이 둥둥 떠오르는 상상을 했다. 저렇게 무뚝뚝하게들 서 계셔도 집에서는 엄청 예뻐하시겠지. 쓰다듬고 안아주고 배도 긁어주고 발바닥에 손도 대어보며. 긴- 인사가 끝나고 푸들 한 마리와 주인, 두 쌍의 산책러들은 다시 천천히 자신들의 길로 나섰다. 그사이에도 푸들 친구들은 이리저리 세상 구경하느라 바쁘고 주인들은 가끔가끔 줄을 풀고 당기며 인파 사이로 천천히 사라져 갔다. 무심하게 뚜벅뚜벅 그러나 열심히 걸으며. 나도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마음이 포근한 게 봄은 봄이로구나 생각하며.


세상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들이 아주 작은 것들을 소중히 다루며 사랑할 때, 그런 풍경들을 만날 때 커다란 꽃다발을 선물 받은 것만 같다.


 

# 풍경 셋

목요일 4교시 B반 수업. 마치면 바로 점심시간이라 아이들은 늘 살짝 들떠 있다. 3월까지만 해도 신학기라 그런지 아니면 내가 혼자 괜히 어색해해서인지 아이들과 친해지기가 영 쉽지 않았다. 이렇게 저렇게 말을 붙여 봐도 돌아오는 반응은 영 시원치 않고. 하긴 작년에는 못 보던 얼굴이 갑자기 나타나 친한 척하며 말을 붙이면 나라도 어색하고 불편해 저어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교실에 들어서서 수업 시작 전까지 아이스 브레이킹을 하는 시간이 생각보다 힘들었다(초면에는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차라리 수업을 시작하면 좀 나은데 말이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쏟아지는 눈길들, 자리에 앉히기, 수업 시작을 알리고 출석부에 사인을 하고 몇 마디 안부를 묻는 그 짧은 순간. 사실 이 시간이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는 수업으로 잘 들어가기 위한 동기 부여만큼이나 신경이 쓰이고 중요하게 여겨지는 부분이었다. 마치 항공기 이륙과도 같다고 할까. 항공기가 제 고도를 찾고 순항하기 위해서는 대기를 가르며 목표 고도까지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우선 이륙과 착륙이 무탈하게 잘 되어야 하니까(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그동안 전국의 학교들을 다니며 무수히 많은 학생들과 만나 왔기에 적어도 이 아이스 브레이킹만큼은 자신 있게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겼더랬다. 그런데 웬 걸. 이번에는 쉽지 않았다. 학기 초부터 코로나 확진자가 대폭 늘고, 자가격리와 검사 대기로 인한 결석이 잦아지면서 그리고 듬성듬성 나왔다 말았다 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으면서 관계를 형성하고 쌓아가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는 출석부에 사인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푸념처럼 그랬다.


아이구, 이 녀석들아~ 샘한테 대답 한번 해 주면 안 되니? 우리 좀 친해지자구~


그냥 지나가는 말로 웃으며 그렇게 한번 툭 던졌다. 내 말에 아이들 몇 명이 미안한 듯 겸연쩍게 웃은 것도 같았다. 그러고서 금세 잊어버리고 또 신나게 수업을 하고 나왔는데 그다음 수업이었나. B반에 들어서는데 문을 열자마자 우당탕탕 자리에 앉고 난리가 났다. 그러면서 입을 모아 안녕하세요오~~!! 를 외친다. 어머, 어쩐 일이야? 그러면서도 기분이 좋아 활짝 웃었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안타까울 정도. 기쁜 마음으로 출석부를 열어 사인을 하는데 교탁 바로 앞에 앉은 연호가 나를 흘끔흘끔 보며 뭔가를 말할 듯 말 듯 주저하는 게 느껴졌다. 응? 무슨 할 말이 있나? 살짝 고개를 들어 쓱 쳐다보니 연호가 쑥스러운 목소리로 그랬다.


선생님, 오늘 급식이요...

응? 급식?  


갑자기 웬 급식? 두 눈을 동그랗게 떴더니 연호가 씩 웃으며 그랬다.


뭐 나오는지 아세요?

오, 뭔데? 맛있는 거야?

짜장면요.


그러더니 두 눈이 멋쩍게 빙글 웃었다. 오!!! 맛있겠네!!! 짜장면도 다 나오고!!! 나도 모르게 탄성처럼 내뱉었다. 내 말에 주위 몇몇이 오, 뭐야? 오늘 짜장면? 오예! 하며 개글개글 웃었다. 학교에 오고 전학생처럼 맴돌던 마음이 그 순간 탁 멈추어 선 것도 같았다. 연호가, 아이스 브레이킹을 해 주었구나. 고민하고 주저하다가 부끄럽고 쑥스럽지만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 주었구나. 어른인 내가 아이에게 말을 먼저 건네는 것도 쉽지 않은데, 연호가 내게 말을 건네는 것은 훨씬 더 어려웠겠지. 쉽지 않은 일이었겠다. 그럼에도 먼저 말을 걸어 준 아이가 너무나 고마웠다.


아이들은 수업 종이 치기 5분 전부터 들썩였다. 가장 좋은 강의는 일찍 끝내는 강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를 싹 잊은 것처럼 나는 늘 풀타임을 다 쓴다. 돌이켜 보니 좀 미안하구만. 그래도 큰 불평 없이 제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빛나고 있는 아이들을 볼 때, 일렁이던 마음이 자리를 잡고 고요해진다.


연호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 못 했다. 봄이 가기 전에 슬쩍 이야기해야지. 오늘은 급식이 뭐니 하고. 그때 먼저 말을 걸어 줘서 고마워 하고. 제가 그랬어요? 그러면 어, 네가 그래서 참 고마웠어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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