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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Apr 27. 2022

그건 내게 여행이었네

얼후는 없지만 얼후 동호회에 나갔던 기억에 관한 짧은 기록


'얼후'라는 악기가 있다. 


얼후를 알게 된 것은 스무 살 시절, 한 뮤지션의 노래에서 우연히 흘러나온 선율을 듣고부터이다. 한눈에 반했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것일까. 처음에는 해금인 줄 알았다. 국악기에 관심이 많아 어린 시절 몇 번인가 국악 연주회에 가고, 실제로 대금을 배우기도 한 내게 잔잔하고도 애달픈 얼후 연주는 단숨에 마음을 내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노래를 반복해 듣다가 문득 그래, 이럴 게 아니라 얼후를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해 보자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은 짧고 행동은 빠른 나는, 얼후를 가지고 있기는커녕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얼후와 관련된 모임을 찾기 시작했다. 정말 가진 것이라고는 패기뿐이었던 좋은 시절이었다... 그런데 또 어찌어찌 수소문을 하니 한 포털 사이트에 얼후 동호회 카페가 있었다. 죽어가는 카페였으면 에이~ 하고 말았을 텐데 며칠을 두고 살펴보니 제법 활성화가 되어 있다. 오호! 마침 그 달에 정기모임도 예정되어 있었다. 하! 역시 이건 나를 얼후로 인도하기 위한(?) 운명의 손짓이다! (뭐라니) 나는 덜컥 카페에 가입해 아주 수줍게 가입 인사를 마치고 등업 신청까지 완료한 후 두근거리며 정모 날을 기다렸다.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초짜의 정모 신청글에도 다들 반갑게 환영하는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하지만 설마 얘가 정말로 나올까 반신반의들 하셨던 것 같다. 


당일이 되어 '진짜로' 나타난 나를 보고 '어어얽...' 하던 기존 회원님들의 놀람, 당황, 어색의 컬래버레이션 표정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때 마침 머리를 짧게 자르고 제대로 관리를 안 해 한쪽이 삐죽 뻗친 바람머리를 하고 있었던 내게 그분들은 '저기 혹시... 음악을 하시나요?'라고 물었더랬다. 녜? 음악이요?? 음악은 듣기만 하는데욥. 저는 교육 쪽 전공하고 있슴미다... 앗, 아아... 그렇군요. 아주 어색하게 대화를 마치고 우리는 정해진 장소로 이동했다. 아마 몇몇 회원들의 정기 연주회를 겸한 날이었던 것 같다. 당시 주말 오후 안국역에서 모였는데 먼저 고즈넉한 찻집으로 이동해 얼후 연주를 들었다. 역시나 모양도 느낌도 해금과 비슷했는데, 둘은 줄의 재질과 운지법 등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모인 사람들 중 내 또래는 도예가 좋아서 다시 대학에 들어갔다던 스물 중반의 청년 하나였고, 나머지는 지긋한 나이의 부부, 몇몇 어르신이었다.


고요한 시간이었다.


해금보다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묵직한 느낌이 있었다. 해금이, 나를 봐 달라고 봐 달라고 애처로운 목소리로 운다면 얼후는 입을 다문 채 그 자리에 서서 그저 눈물만 흘리고 있는 느낌이다. 어떤 순간에는 현악기가 아니라 관악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리가 깊었다.


쉽게 떨리지 않고, 쉽게 끝나지 않는다.


사람이, 제 말이 다인 줄 알고 떠드는 것만큼 가벼운 순간도 없으리라(그러나 내가 맨날 하고 있는 일...). 고요를 잃어버린 세상이란 얼마나 무서운가. 연주를 들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날 우리는 같이 저녁을 먹었고, 그중 한 분이 얼후가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활'을 선물했다. 얼후가 없었지만, 어쩐지 가지고 싶어 몸을 들썩거렸다.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활을 나누어 주던 그분이 '나중에 얼후를 연주하게 되면 그때 다시 연락 주세요'라며 껄껄 웃으셨다. 나도 다른 사람들도 따라 웃었다. 그렇지. 얼후도 없이 활만 가지면 뭐해. 욕심이다, 욕심. 


그날 이후 얼후 동호회에 다시 가지는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그 하루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냥, 좋은 것을 찾아 낯 모르는 이들 속에 섞여 낯 모르는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이 좋았던 것 같다. 좋아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쉽게 섞일 수 있었던 내가, 우리들이 좋았던 모양이다. 


쉽게 떨리지 않고,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얼후에서 배운 미덕을, 오래도록 잊고 사는 중이구나 싶다. 대금이 좋고, 판소리가 좋아 해 질 녘이면 하늘이 보이는 창가에 누워 연주곡을 듣던 열두 살의 내가 왠지 아-주 멀리 있는 것 같다. 그 아이는 여전히 이곳에 남아 나와 아주 가까이에서 살고 있는데 말이다.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오며 어쩐지 낯 모르는 곳으로 잠시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었다. 정말 그렇다. 그날 이후로 다시는 그때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다시는 눈앞에서 얼후 연주를 듣지 못했으니까. 그건 내게 여행이었네. 언제고 다시 떠나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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