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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Apr 18. 2022

영화 <해피아워> 관람기

328분간 떠난 짧은 여행, 그 하루에 관한 짧은 기록




작년 12월,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어느 추운 겨울날 저녁이었다.


자, 이제 들어가면 끝날 때까지 집중해야 되니까 뭐라도 좀 먹어 두자고.

그럴 줄 알고 내가 젤리랑 초콜릿을 사 왔지.

오! 역시 현명한 친구로군.

중간에 인터미션 있다니까 화장실은 그때 잽싸게, 오키?


R과 나는 명동의 한 영화관에서 한껏 상기된 얼굴로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해피아워>. S의 강력 추천으로(그는 이 작품이 3n 년 중 가장 인상적으로 본 인생 영화라고 했다) 흥미가 생겨 한번 봐야겠다 찜해 두고 있었는데,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마음먹고 나선 길이었다. S는 꼭 보기를 추천하면서도 약간 주저하듯이 말했다.


너도 꼭 보면 좋겠는데, 근데...

근데...?

근데, 영화가 좀 길어.

아, 길다구? 뭐, 타이타닉 정도 돼? 하하하하

타이타닉은 양반.

...응?


내가 본 영화 중 그나마 길다고 생각했던 게 <타이타닉>인데 그보다 길다니...? 대체 얼마나 길기에? 호기심에 당장 검색에 들어갔다. 317분. 인터미션 포함하면 328분. 아, 3시간 28분. 워후, 길긴 길구만. 다시 S에게 연락을 했다. 야, 뭐 3시간 28분 정도면 그래도 괜찮네. 허리는 좀 아프겠지만 가능하겠는 걸? S가 뭐? 하더니 하하 웃으며 말했다. 야, 뭔 소리야. 잘 봐. 3시간 28분 아니고 328분일 걸?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래, 328분. 3시간 28... 그러니까 300분 그리고 28...?!


328분.

그러니까, 5시간 28분.


예...? 3시간도 아니고 5시간?! 5시간 28분?? 그러니까, 단순 계산으로 어림잡아 보아도 1시에 시작하면 6시 28분에 끝나고 2시에 시작하면 7시 28분에 끝난다...? 이 정도면 베트남에 갈 수 있는 편도 비행시간이로군. 그러다 보니 처음에는 괜히 엄두가 안 났다. 그 긴 시간을 영화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을까? 중간에 갑자기 화장실에 엄청 가고 싶으면 어떡하지?(뭘 어떡해 최대한 조용히 갔다 와야지... 참다가 실려가거나 그 자리에 지릴 수는 없...) 재미없어서 중간에 나가고 싶어지면 또 어떡하지?(소심해서 못 나갈 거 다 알아...) 아니, 그보다 이 영화는 대체 뭔데 러닝 타임이 이토록 긴 거지?(근본적인 궁금증) 이렇게 긴 영화가 영화관에 걸렸다고?(이건 진짜 좀 대단하네)


이런저런 이유로 오래 망설이다가 결국 보기로 했다. 영화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렇게 긴 영화를 본 그날 하루가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아서. 낮에 들어가 밤이 되어 나오는 시차도 오랜만에 느끼고, 한국에서 출발해 낯선 이국땅에 내리던 여행의 기분도 오랜만에 느껴 보자! 그즈음 시간이 맞은 R을 꼬셔서(?) 인생 역작을 한번 만나 보자며 기대 반 걱정 반을 품고, 명동으로 향했다.

  


 

줄거리는 알려진 바와 같다. 30대 후반에 접어든 네 명의 여성이 주인공. 이름은 아카리, 사쿠라코, 후미, 준으로 친한 친구들이다. 이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잘 안다고 자부하며 정기적으로 만나고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정말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것일까. 어느 날, 사실은 '이혼 소송' 중임을 밝히며 돌연 자취를 감춘 준을 둘러싸고, 이들은 지금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거나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며 새삼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게 된다.


줄거리 자체가 굉장히 새롭거나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익숙한 패턴에 가까웠다. 평범하게 잘 살던 혹은 잘 살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갑작스레 마주한 삶의 어떤 이벤트 앞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현재를 바라보며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된다, 혹은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혹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 와 같은 스토리는 이미 많은 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어 다뤄져 왔으므로. 이 뻔하다면 뻔한 이야기를, 그렇다면 이 영화는 무슨 자신감으로 5시간 넘게 다룬 거지? 괜히 질질 끈 건 아닌가? 단순한 이야기를 길고 길게 늘여서 5시간으로 채운 건 아닌가? 처음에는 이런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아워>는 재미있었다. 중간중간 지루한 장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317분이 결코 길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R도 비슷한 생각이었는데 왜 그럴까 생각해 본 결과는 바로 이랬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 역시 영화 속의 일부로 동참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무엇이 있다는 것. 실제로 주인공들이 함께 떠난 온천 여행에서, 워크숍 뒤풀이에서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신에서 나는 문득 내가 이들과 한 테이블에 앉아 그 일원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30분 넘게 이어진 워크숍 신이나 '노세'라는 신진 작가의 신작 낭독회 신에서는 참여자로, 독자로 그 긴 시간을 함께하며 정말 그 자리에 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만큼 영화에서 각 신을 조망하는 방식이 익숙한 듯 낯설었고, 여기에서 오는 새로운 느낌이 좋았다.


돌이켜 보니 이런 느낌으로 영화를 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가령, 어떤 영화를 보다 보면 엄청 재미있고 신나고 흥미로워도 말 그대로 '너무 영화 같아서' 그 시간이 끝나고 나면 아 영화였지, 잘 봤다 하는 정도의 느낌으로만 남는다. 그렇게 금세 현실로 돌아와 영화 따윈 싹 잊고 일상에 전념하게 되는데, <해피아워>는 달랐다. 일상성이 짙은 영화라 그런지 보고 나서도 오래 여운이 남았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문득문득 생각났다. 영화가 아니라 다큐, 다큐가 아니라 실제 잠시 일본으로 건너가 어떤 소시민들의 삶에 녹아들었다 나온 것처럼 이입과 전이가 잘 되는 작품이었다. S가, 왜 인생 영화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았다. 비슷한 나이대의 여성들이 주로 부딪힘직한 벽과 이를 해결하는 방식에 대해 하나의 예시를 보았다고 할까.


하지만, R 나는 공통적으로 '인생 영화까지는 아니라는 ' 입을 모았다. 우선, 싱글 여성의 입장으로 가정이 있는 그녀들의 고민에 아주 깊이 공감하지는 못했고(어떤 행동과 대사들에 대해서는 ? 뭐지? 하기도), 그나마 '아카리'(그녀는 돌싱으로 다른  명의 친구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싱글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비슷한 입장이었지만 삶의 방식이나 태도에서는 그마저도 상당히 달라 ...... 했다는. 주인공이 ' 명의 여성'이라 30 후반 여성의 삶과 고민, 으로  주제를 국한해 설명하기는 했지만 사실 생의 한가운데 즈음에서 문득 마주하게 되는 벽이랄까. 삶에의 고민에 나이와 성별의 구별이 특별히 있을까 싶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명의, 일견 '동질적인 나이대, 성별' 들어 이를 그려냈지만 남녀노소 각기 다른 네 명의 주인공들을 골라잡았더라도 결국 의미 있는 신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추측. 그러니까, 인간적 고뇌와 위기, 갈등과 해소라는 측면에서는 일곱 살과 열일곱 , 스물일곱과 마흔일곱, 일흔일곱과 아흔일곱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겪어내고 있을 테니까.     


자, 그렇다면 <해피아워>라는 제목은 어떨까. 문제를 읽기도 전에 정답을 알아버린 느낌. <해피아워>라니. 너무도 직접적이고 뻔한, 익숙하게 닳아 버린 단어가 아닌가. 그런데도 이 제목, 영화의 내용이랑 참 묘하게 잘 어울린다. 아, 뭐야. 너무 식상한 것 같은데 라고 생각하며 영화를 보기 시작했는데 끝나고 나니, 음- 역시 해피아워인가- 중얼거리게 되었달까. 가끔은 새롭다 못해 너무 낯설어서 엥? 하고 잔뜩 괴리를 느끼게 되는 비유보다 이렇게 명확하고 직접적인 표현이 더 와닿는 것 같다. 그래서 당신의 지금은 어떻습니까? 해피아워입니까? 해피합니까? 그러니까, 당신의 해피란 무엇입니까?


그런 질문을 안고 한낮 무렵 떠난 5시간 반의 여행에서 중간중간 허리를 비틀고 순간 꿈나라 기차를 탈 뻔 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날의 탑승객 모두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저녁에 도착했다. 영화관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깊은 저녁이었다. 낮에는 혹시 잠든 게 아닌가 싶었던 거리가 성성히 살아 움직이는 연말연시의 풍경을 보면서 R과 나는 옷깃을 여미고 명동교자로 향했다. 순번을 기다려 따끈한 칼국수 한 그릇과 만두 한 접시를 마주한 우리는 후룩후룩 면발을 삼켰다.


야, 이게 해피아워 아니냐.

그렇지. 이거지.

영화 한 편 보고, 따끈하게 국수 한 그릇 하고.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쉬는 것.

이게 행복이지.


부지런히 먹고 마시며, 인생의 묘미는 아주 먼 곳이 아니라 이렇듯 짧은 찰나에, 너무 사소하고 익숙해서 평소에는 있는지도 잘 모르는 순간들에 존재하는 것이라 너스레를 떨었다. 야, 그 워크숍 신 좀 길지 않았니? 그것도 긴데 나는 낭독 신이 진짜 길게 느껴졌어. 하마터면 잠들 뻔. 아, 그 신에서 신작 소설 말이야. 그거 찍으려고 일부러 새롭게 쓴 소설일까? 그렇지 않을까? 그렇다면 진짜 대단하네. 그 영화를 위해 들인 노력을 생각해 봐. 난 5시간 반을 그대로 만든 용기가 더 대단하다. 그건 그래. 그게 진짜 멋있는 거네. 뭐랄까. 이 영화는 이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볼 테면 보고 말려면 말아라 약간 이런 태도? 너 같으면 5시간 반으로 올릴 수 있었겠냐?


R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같으면 누가 이거 너무 긴데요? 하면 엄청 굽실대면서 바로  예예, 너무 길죠? 예예, 2시간 반이요? , 1시간 반이요? , 1시간이요? 이러다가 결국 15분으로 줄어서 단편영화제에 냈을 . 그랬더니 R  터졌다. 사실 단편영화제에라도 냈으면 용했을 . 제목도 <해피아워>처럼  명확하게  짓고 뭔가 <해피아워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 및 그 결과에 관한 짧은 기록> 뭐 이렇게 지어서 검색하면 다 못 나오고 <해피아워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 이렇게 짤려서 나왔을 듯.


      


 

아, 또 그러면 뭐 어때. 아무렴 어떤가. 정답도 없고 오답도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그날 328분짜리 영화를 보고 따끈한 국수 한 그릇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한 후 연말연시 분위기로 반짝이는 길을 걸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해피아워>의 주인공들이 그랬듯, 우리들 역시 각자 자신의 삶을 영위하며 멀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비슷한 듯 다른 속도로 생의 한가운데를 향해 걷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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