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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May 25. 2022

아무튼 같이 사는 것, 살아가는 것

배달 음식 시켜 먹은 어느 날 저녁에 관한 짧은 기록



저녁나절이 되자 여지없이 배가 고팠다. 배고픔이란 어쩌면 이리도 '다른 여지' 허용치 않는지. '오늘 저녁은  가볍게 먹어 볼까.'라는 점심 무렵의 마음이 무색하도록 꼬르륵거리길래 일단 밥솥을 열어 보았다. 밥은 있고, 그렇다면 간장을 넣고 간장계란밥이라도  볼까. , 왠지 오늘은 그마저도 별로  땡기는 조합이다. 뭔가 새로운 것을 먹고 싶다(대체 얼마나 새로워야  생각을 그치게 될까). 그렇다면, 배달 음식. 벌써 여러  마음먹고 지웠다 깔았다  앱을 다시 슬며시  본다. '먹은 마음 도로 뱉어내기' ' 입으로  말하기' 국가대표급이다.


무얼 먹겠다는 목표도 없이 이곳저곳을 손끝으로 눌러보다가 우연히 한 곳에서 멈추었다. 'OO 곱창'. 집 근처의 가게들을 쭉 보여주는 기능인지 마침 가까운 가게였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이었던가. 어쩌다 지하철 반대편 출구로 잘못 나와 늘 가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돌아 돌아 집에 온 적이 있다. 그때 슥- 하고 지나쳐 갔던 집이다. 오, 이런 곳이 있구만! 시간대 때문인지 어째 불이 꺼져 있던 그 가게의 이름만 대충 보고는 말았는데 앱에서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오, 주력 메뉴는 무엇이려나. 흥미 있게 들여다보는데 주인장의 공지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저희 가게는 지난 O월에 폐업했습니다. 그런데 고객님들의 성원으로 재오픈했습니다.(계약 1년 연장) 하지만 매출 부진으로 인한 본사 권고로 올해 계약 만료일까지 목표 매출을 달성 못하면 폐업입니다. 그래서 O월까지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모자란 매출 OO% 상승. 둘째, 찜 개수 1000개. 셋째, 최근 리뷰 2000개. 아직 포기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나도 모르게 최근 리뷰 수를 봤다. 1000개에도 한참 모자란다. 찜 개수를 봤다. 리뷰 수보다는 많지만 그래도 목표에는 아직 못 미친다. 어떡하나. 마음이 조급해졌다. 얼른 찜부터 누르고 나도 모르게 사람들이 추천한 야채 곱창 하나를 장바구니에 넣는다. 쌈 세트를 더하면 3000원이 추가되지만 개의치 않고 그것도 추가한다. (잔고가 자꾸 축나 오늘부터는 긴축 재정 돌입이다!라고 결심했던 게 불과 어제이지만 일단 모른 척해 본다.)


주문이 들어간 지 정확히 15분 만에 초인종이 울렸다. 엇?! 느긋하게 커피 한 잔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아 있다가 화들짝 놀랐다. 분명 예상 시간 50분으로 떴는데 35분을 단축한 배달이라니! 괜히 찜찜한 마음으로(다른 곳에 가려던 배달이 중간에 이쪽으로 오기도 한다는 낭설을 어디선가 들어서) 배달 봉투를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아주 따뜻하고 묵직하다. 문득, 그냥 다른 배달 주문이 없어서 반가운 마음에 벌떡 일어나 빠르게 조리해 얼른 가져다주신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정성스런 포장을 보니 아무래도 그런 것이 틀림없다.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고 길을 걷다가 우연히 들여다본 풍경 속에는 늘 어두컴컴한 가게들이 있었다. 고별 정리, 폐업,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임대 문의... CLOSED라는 팻말이 붙은 채 끝내 OPEN 쪽으로 돌아서지 못한 곳들도 있었다. 어쩌다 문이 열린 가게들도 주인장 홀로 앉아 TV를 보고 있거나 텅 비어 있어 운영 중인지 잘 알 수 없는 곳들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마음이 함께 어두워졌다. 일이 없는 시절의 한낮은 아무리 좋게 생각하려 해도 막막하기만 하다. 앞으로 이렇게 계속 일이 없으면 어떡하나 하는 한숨부터 당장 다음 달은 또 어떻게 사나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져 올 때 흔히 기대는 것들에 좋은 것은 별로 없다. 어려운 시절에 마음 건강과 몸 건강을 함께 해치게 되는 것은 대체로 그래서일 것이다.  


음식을 하나하나 상 위에 펼쳐 놓는데, 시킨 적 없는 옥수수 콘샐러드에 주인장의 포스트잇 메모가 붙어 있다. 맛있게 드시고 찜과 리뷰 별 다섯 개를 부탁한다는. 조금이라도 더 근사해 보이도록 정성스레 사진을 찍고 저녁 한 끼를 그으며 리뷰를 썼다. 너무 맛있었다고, 오래오래 가게를 열어 주시면 좋겠다고. 별 다섯 개 모두를 눌러 색칠을 했다. 주인장은 요즘 어떤 마음으로 음식을 만드실까. 하나의 강의가 어렵게 잡히고 혹시 다음이 없을까 봐 영혼을 갈아 넣어 준비를 하고 모든 것을 털어내고 나오던 어느 시절의 내가 생각났다. 그때는 거의 매일 악몽을 꾸었다. 그중에서도 강의 시간에 늦어 펑크를 내는 꿈이 단골이었다. 지금은 스스로를 그렇게까지 몰아세우지는 않지만 '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현실은 사실 여전하다. 프리랜서의 숙명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원래 그런 사람인 걸까. 왠지 둘 다여서 시너지가 난 것 같다. '에잇, 다음이 없으면 뭐 어때?'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남은 '다음 날' 들이 좀 많은 것 같기는 하다.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럴 때는 내가 엄청난 우주 먼지임을 기억하자. 그래, 먼지도 이런 먼지가 없지. 지구의 눈도 아닌, 천왕성의 눈으로 나를 보면 이건 뭐 나노 입자 하나는 될까? (나노 입자가 뭔지 잘 모르지만 내 수준에는 가장 작은 것 같아서 그냥 갖다 붙여 봄)


음식은 무척 맛있었다. 그렇게 저녁 한 끼를 긋고 나서 베란다에 서서 오랫동안 바깥을 내다보았다. 알맞게 내린 저녁 어스름을 헤치며 달리는 자전거, 팔을 휘두르며 걷는 사람, 헛둘헛둘 빠르게 사라지는 러너들. 마음이 산란할 때 밖을 내다보면 그래도 적이 누그러진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찜 하나를 더 누르고, 리뷰 한 번을 더 쓰는 것이지만 아무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내 곁을 살아가는 삶들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내 빛을 조금 줄여서라도 희미하게 서로를 비추는 것. 아니, 뭐 그냥. 아무튼 같이 사는 것. 같이 살아가는 것. 우당탕탕이건 사뿐사뿐이건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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