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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06. 2022

영화 <아무도 모른다> 재관람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다시 본 새벽에 관한 짧은 기록


2005년 봄, 대학 3학년이 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오후였다.


무슨 요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전공 필수과목인 <교육과정> 수업이 있었고,  시간 열심히 들어 보려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 앉았다가도 곧잘 고개를 떨구고 졸았던 기억이 있다.  교수님의 잔잔한 목소리와 수많은 교육학자들의 이론을 배경 삼아 신나게 꿈나라에 다녀오면 대체로 수업이 끝나가던 기억. 그러다 어느 날엔가는 그만 탈출을  버렸다. 범생이 기질을  버리고 그래도 수업에는 꼬박꼬박 참여했었는데 그날은 날도 너무 좋고 여차저차 해서 결국 줄행랑을 놓았다. 어렵게(?) 수업을 쨌는데 뭔가 거대하고 웅장한 일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음료수 하나를  들고 비잉- 교내를 돌다가 덜렁 집으로 가는 버스를  버렸다. 그래도 그냥 들어가기는 못내 아쉬웠는지 그마저도  이탈해  영화관 앞에 섰고 그때 보았던 작품이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아무도 모른다>였다. 그때는 스마트폰도 없었을 때인데 어떻게 용케  영화를 보았지? 아마 어디에선가 '실화' 바탕으로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영화를 마음에 품고는 있었던  같다. 사회파 소설이나 영화들에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알려진 바, 1988년 일본 전역을 발칵 뒤집어 놓은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영화이다. 당시의 사건에서 구성을 가져오기는 했지만 몇몇 사실 관계들에서는 차이가 있다고 한다. 당시 러닝타임이 2시간이 넘는 줄 모르고 표를 끊었다가 뭐야, 엄청 기네! 하며 집중해서 볼 수 있을까 걱정했다. 딱 봐도 잔잔해 보이는데 보다 조는 거 아닐까?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은 많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며 '아니, 어떻게 아무도 모를 수가 있지? 아이들만 넷이서 살아가는데! 옆집은 뭘 했던 거야?' 등지의 생각을 곱씹고 있었다. 이윽고 영화가 시작되고... 나의 이 모든 생각과 걱정들은 한순간에 날아갔다. 잔잔해서 충격이었고, 묵묵해서 마음 아팠다. 영화의 시작 역시 고요하다. 끝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모든 장면들을 보고 있는 관람객은 아마도 '알고 있는 자이자 살아남은 자'의 괴로움과 슬픔을 여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아무도 모르는 그 일들을 전부 다 아는 사람의 괴로움과 슬픔. 그래서 이 영화는 끝내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일'로 치환되어 읽힌다. 


덜컹이는 밤 열차. 무표정한 얼굴의 장남 아키라. 후줄근하고 지쳐 보이는 아키라 앞에는 커다란 분홍색 캐리어 가방이 놓여 있다. 조용히 캐리어를 쓰다듬는 아키라의 손톱이 지저분하다. 차창 너머로, 열차가 지나고 있는 밤 풍경이 반짝이며 펼쳐진다. 화면이 암전 되며 그 위로 타이틀이 조용히 떠오른다.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 씬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다. 한참 영화가 진행되고 나서야 깨달은 이 장면의 비밀은 결말에 이르러서야 밝혀진다. 언뜻 봐도 참 철없어 보이는 엄마 케이코. 그녀는 각기 성(姓)이 다른 자녀 넷을 키운다. 성이 다른 자녀를 키우는 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실제로 초반의 그녀는 어떻게든 자녀 넷을 끝까지 포기 않고 같이 키우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이가 넷이나 되기 때문에 이전 집들에서 여러 번 쫓겨난 것인지. 케이코는 이번 집으로 이사 오자마자 장남 아키라를 데리고 이웃에 인사를 간다. 새로 이사 온 203호의 후쿠시마라고 합니다. 남편이 해외에 있어서 식구는 얘랑 저랑 둘뿐이에요. 초등학교 6학년이라 이제 곧 영어도 시켜야 하고... 네, 다행히 남편 닮아서 공부를 꽤 잘하는 편이에요... 이웃은 안심한다. 애들이 많으면 영 힘들어서요.


안타깝게도, 엄마 케이코의 말 대부분이 거짓이다. 캐리어에 숨겨 온 아이가 둘(셋째 시게루와 막내 유키). 둘째 쿄코는 이삿짐센터가 모두 철수한 밤이 되어서야 몰래 집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엄마 케이코는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돌아오기 때문에 동생들을 돌보는 것은 거의 아키라의 몫. 둘째 쿄코도 거들지만 역시나 이들도 아직 어린아이. 이 모든 것이 힘에 부칠 때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문제. 실제로 아키라와 쿄코는 여러 번 엄마에게 학교에 보내달라 말하지만, 엄마는 딱 자른다. 학교 그거 뭐, 가 봤자야. 다녀서 이득 볼 게 없다. 누구도 학교 안 가고 성공했고, 또 누구도 그렇다. 하지만 빈약한 논리다. 영화에서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아마 엄마 케이코는 여러 남자들을 만나며 아이가 생기면 그때마다 낳아 키웠던 것 같다. 문제는 출생 신고. 학교에 가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일단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즉, 출생 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세상에서는 이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취학 연령에 다다른 아동이 학교에 나오지 않는다면, 일단 확인 절차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나 이들 가족에게는 그런 일 자체가 없었다. 실제로 '스가모 아동 방치 사건'에서도 그랬다고. 아이들의 출생 신고가 안 되어 있어서 세상은 이들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고 한다. 가끔 한낮에도 밖에서 놀고 있는 이들을 보며 이상하게 여긴 사람들이 어느 초등학교에 다니냐 물으면 'OO 초등학교'라고 답했단다. (이 역시 엄마가 시킨 것)


영화에서 엄마 케이코는 결국 다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언제 돌아오겠다는 기약도 없이 떠난다.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에는 오겠지, 새해에는 오겠지 하며 이른 가을부터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가 놓고 간 돈도 다 떨어져 간다. 그에 비례하게 집안은 엉망이 되고, 아이들의 표정에는 어둠이 드리운다. 옷도 다 떨어져 간다. 이 모든 과정이 잔잔하고 조용하게, 마치 화지에 검은 물이 스미듯 진행된다. 그사이 아키라는 장남의 책임감으로 여러 차례 엄마와 통화를 시도하지만, 엄마는 퇴직한 지 오래다. 몇 번째 시도일까. 그러다 어느 순간 어렵게 연결된 엄마의 목소리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네, 야마모토입니다.'   


2005년 그해 봄에 나는 이 영화를 보며 숨죽여 울었다. 특히 아키라와 엄마의 통화 씬에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결국 아키라는 자신이 누구라는 이야기도 못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 막내 유키가 아껴 먹던 아폴로 초콜릿. 이듬해 처음으로 일본에 갔던 나는 편의점에서 아폴로 초콜릿을 발견하고는 하나를 사서 아껴 먹었다. 마치 유키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의 설정상 넣은 씬일 수도 있겠지만, 아직 대여섯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그 작은 초콜릿을 몇 날을 두고 아껴 먹는 것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는 아이들이 많을 테지. 초콜릿 하나를 먹으려고, 밥 한 끼를 먹으려고 오래 기다리고 참고 견뎌야 하는 어떤 날들 속에 있는, 아직 어린아이들이 많을 테지. 어쩌면 내 이웃, 어쩌면 건너편 집. 굳게 닫힌 철문들 사이에 사는 내가, 그렇다면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라고 일갈할 수 있을까. 영화관을 나오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일견 축 처져 무기력해 보이던 것은 착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한껏 수그러든 채 걸었던 그날 오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2017년 재개봉 당시는 보지 못했고, 이번 주말에 문득 생각이 나서 찾아보았다. 밤늦게 보기 시작했는데 도중에 멈출 수가 없어서 새벽까지 다 보았다. 2시간 20분이 순식간에 흘렀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분노하고 가슴 아파하고만 있구나. 그때는 그래도 열의라도 넘쳐 치기 어린 열정에 뭔가를 해 보겠다고 공부도 하고 NGO에도 들어갔는데, 지금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는 어떤 어른이 되었나. 아무도 모르는 일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자 하며 알게 된 이후에는 그것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하고 있을까. 아무도 듣지 않아도, 아무도 보지 않아도 어쨌든 벌어지고 있는 이 '아무도 모르는 일들'에 관하여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 걸까. 그럼에도 누군가의 눈에는 보이고, 누군가의 귀에는 들려야 하지 않겠나. 모든 사람까지는 아니어도, 몇몇 사람에게라도, 아니 단 한 사람에게라도 어떤 일들은 반드시 보이고 들려야 하지 않겠는가.


삶이라는 폭우에 휩쓸려 이렇게 살다가, 살아가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는 한낮의 순간이란- 섬광처럼 이리도 짧다. 그럼에도 그렇게 잠시나마 보였던 빛에 의지해 내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잊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 자, 그럼 이제 다시 생각해 보자. 무엇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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