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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08. 2022

'조용' 아니고 '조용필'

 꾸벅꾸벅 졸아도 아무튼 즐거운 이팔청춘들에 관한 짧은 기록


고등학생쯤 되면 '사뿐사뿐' 걸을 것 같지만 웬걸.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ㄸ...(너무 오래된 개그는 그만...) 아무튼 천만의 말씀이다. 복도에서는 열을 맞추어 사뿐사뿐 한 방향으로 걸어야 한다고 배우긴 했지만 배웠다고 다 그대로 살면 이미 이 세상은 천국일 것. 


아이들에게 복도란, 짧디 짧은 쉬는 시간 동안 십분 활용해야 하는 스피드와 스릴의 공간이다. 옆 반 친구랑 수다도 떨어야 하고(옆 반이면 다행이다), 무려 50분 동안 떨어져 있던 연인(이제 CC는 초등학교부터... 아니 어쩌면 유치원...)의 얼굴도 봐야 한다. 가끔 복도 정중앙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사이좋게 걸어오는 커플을 만나면 자연스레 옆으로 비켜준다. 그래, 애틋하구나.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렴(찡긋). 그뿐인가. 인류의 생존에 가장 중요한 활동도 해야 한다. 화장실 가기. 요즘 코로나로 매점 문이 닫힌 것이 좀 애석한데, 만약 매점 문까지 열렸으면 그야말로 대환장... 아니 대환희의 복도가 되었을까나. 


아무튼 이래저래 학교 복도가 조용한 시간은 학생들의 등교가 본격화되기 전인 이른 아침이나 방과후겠다. 나는 복잡한 시간대를 피해 이른 시간을 골라 출근하고 있는데, 어느 날 2층 복도 1학년 교실 앞을 지나다가 멀리 이런 팻말을 본 것이다. 


'조용' 


바로 생활안전부 앞이었다. 하하, 이 똥강아지들이 얼마나 뛰어다녔으면 '조용'이라는 팻말을 다 세우셨을까. 웃음을 흘리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팻말 앞을 지나며 슬쩍 다시 보니 '조용'이 아니었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용' 옆에 펜으로 작게 '필'을 적어 놓았다. 그렇다면 무려...


'조용' 아니고 '조용필'


...이 되시겠다. 순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킥킥 숨죽여 웃으며 얼른 그 앞을 지나갔다. 혹시라도 누군가 나와 무슨 일이냐고 하면 '아, 조용필 때문입니다. 예예.' 하기는 좀 그러니까. 아니, 그런데 요 녀석들이 '가왕 조용필'을 어떻게 알지? 현재 고1이라면 이제 아이들의 나이는 2005년생을 지나 2006년생으로 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좀 놀라웠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가왕의 품격인가!! 가만, 명곡 <Bounce>가 언제 발표되었더라. 찾아보니 2013년 봄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이제 막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을 무렵. 오호, 그렇다면 말이 된다. 어릴 때이기는 하지만 충분히 노래를 따라 부르며 깔깔댈 수 있는 나이. 역시 <Bounce>의 인기는 세대를 아우르는구나. (...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단정지었음)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부모님 중 가왕 조용필을 사모하여 틈만 나면 여러 명곡들을 틀어 놓았던 분이 계실 수도.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날 하루 나는 괜히 기분이 무척 좋아 나는 듯 수업을 하고 돌아왔다. 아이들이, '조용' 대신 '조용필'을 써 놓은 것이 왜 기뻤을까. 그것도 '생활안전부'라는 가장 엄격하고 두려운(?) 교무실 앞에서 그래 놓은 것이 말이다. 그냥 아이들이, 아이들다운 것이 참 귀엽고 예뻤다. 그래서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조용필' 팻말을 그대로 둔 것이리라. 비록 기말고사가 3주 남은 시점에서도 졸음이 쏟아져 꾸벅대고, 글쓰기 수행평가가 한 번 더 남은 것에 비명을 지르지만(분명 이백 번 정도는 이야기한 것 같은데 아이들은 영 금시초문이라는 듯 비명부터 질렀...) 이 역시 너무나 십 대들다워서 보고 있으면 그냥 웃음이 난다. 나는 청소년기 아이들이 참 귀엽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청소년을 키우고(?) 있거나 청소년기에 다다른 아이를 둔 선배들, 친구들은 비명을 지르며 '징그럽지 뭐가 귀여워!!' 하기 일쑤지만... 나는 그저 귀엽다. 그래서 중등교육을 전공하고 이 나이 먹도록 학교 주변을 맴돌며 못 떠나고 있나 보다. (여고괴담도 아니고...) 


어제는 아이들이 하도 졸길래(...불꽃쇼나 마술이라도 배워야겠다...) 수업에 들어가면서부터 신신당부를 했다. 얘들아, 이제 기말고사가 얼마 안 남았잖니. 따로 공부하지 말고 수업 시간에 끝내 버리자. 생각해 보면 나도 못한 일을 아이들에게는 참 잘도 주문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또 착하게도, '아아, 안 자요! 오늘은 열심히 할 거예요!' 호언장담들을 하는데, 한참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영락없이 하나 둘, 꿈나라 기차에 올라타기 시작한다. 그래도 끝까지 졸음과 사투를 벌였다는 데 일단 의의를 두고, 그렇게 부지런히 깨우랴 진도 나가랴 초여름 문학 수업은 50분이 모자라기만 하다. 좀 더 재미있고 의미 있게 가르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진도 나가기에 바빠 더 많은 것을 시도해 보지 못한 것이 지금에서야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단 기말고사를 잘 마무리하고 나면 방학까지 남은 시간 동안은 다양한 것들은 시도해 보고 싶다. 가왕 조용필의 노래를 같이 들으며 시대를 막론하고 명곡으로 추앙받는 노래들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 나누어 보아도 좋을 것이다. 노랫말도 결국은 문학이니까. 


나도 '조용' 옆에 조그맣게 '필'자를 넣어볼 수 있는 그런 어른이고 싶다. 주변에서 뭐야, 그게! 유치하게!라고 하면 뭐 어때용? 우리 다들 그랬잖아용? 하고 너털웃음을 지을 수 있는 어른. 원리와 원칙을 해하지는 않되 그 안에서 자유롭게 놀아볼 수 있는 어른이라면 아이들도 조금은 마음을 놓고 그들의 시간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금도 엄청 즐기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렇다면, 다행이다. 아이들처럼 나도 내 시절 안에서 때로 힘들고 어려워도 아무튼 즐겁게 지내봐야지. 내 시절도 날마다 새롭게 돌아오는 새로운 시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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