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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11. 2022

때로는 진실이 아니어도 괜찮다

넷플릭스 <타일러 헨리: 죽음 너머를 읽다>에 관한 짧은 기록


유독 잠이 안 오는 밤이 있다. 그런 날에는 괜히 이 책 저 책을 들추어 보거나 TV를 켜고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거나 그도 아니면 인터넷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서핑하며 결국에는 '그 무엇에도 머물지 못하고 떠돈다'. 그야말로 Killing Time이지만,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어떡하나. Killing을 슬쩍 Healing으로 바꾸어 불러 본다. 넷플릭스 <타일러 헨리: 죽음 너머를 읽다(Life After Death)>를 보게 된 것도 이렇게 Heaing Time을 즐기던 중이었다.


넷플릭스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어 흡사 라스베이거스의 금요일 밤 같다(안 가봤지만). 그래서 '이거 봐야지'하고 들어갔다가도 오, 이것도 있네? 이런 것도 있고? 이런 것까지 있다니! 하며 본래의 목적을 잃고 헤매기 일쑤. 그런데 엊그제는 어쩐 일로 별로 헤매지도 않고 한눈에 이 시리즈를 클릭하게 되었다. 글쎄, 어떤 연관성으로 뜨게 되었는지. 이 시리즈를 보기 전까지 나는 타일러 헨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그는 미국에서 꽤나 유명한, 말하자면 영매(medium)라고 한다. 죽은 사람의 혼령과 소통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 말이다. 오호... 미국에도 이런 존재가 있고, 이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라고 생각한 찰나 그 유명한 영화 <사랑과 영혼>에도 나오지 않았던가. 우피 골드버그가 분한 그 역할 말이다. 그렇지. 어디에나 있겠지. 산 자와 죽은 자를 매개하는 사람이. 왜냐하면- 가까운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과 가까운 이를 떠나 온 사람들의 마음이 그렇게 무 자르듯 뚝! 하고 한순간에 끊어지기는 힘들 테니까. 어떻게든,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져 있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사는 동안 이따금씩 아프게 시려 오는 마음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래서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떠난 이들이 이제는 괜찮다고. 평안히 잘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함께라고.  


처음에는 한 편 정도만 보고 끝내려 했다. 그런데 이 시리즈. 마치 막장 드라마처럼 아주 기묘하고 아슬아슬한 순간에 뚝 끊고 엔딩 타이틀을 올려 버린다. 그럼 나 같은 조급증 환자들은 약이 올라 억! 뭐야 뭐야!! 빨리 다음 화!!! 를 외치며 넷플릭스가 의도한 대로 아주 공손하게 정주행을 진행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저녁은 밤으로, 밤은 자정으로, 자정은 새벽으로 시리즈와 함께 달려 나간다. 그렇게 이틀에 걸쳐 7화까지 봤다. 에? 겨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드라마 <허준> 이후로 뭔가를 진득하게 챙겨 본 적이 거의 없는 나에게는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나마 좀 챙겨 보려고 했던 게 <응답하라 1988> 정도) 영화 <해피아워>를 본 후로 일종의 시청력(?)이 많이 는 것 같다.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타일러 헨리라는 사람은 1996년생으로 상당히 젊은 영매이다. 본인 피셜로 10살 무렵 죽음 너머를 읽는 능력을 발견하게 되었다는데 그때는 너무 어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던 것 같다. 이 시리즈는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미국 전역에서 엄선한 의뢰인들과(대부분 뭔가 좀 극적이고 사연이 있는 사람들로 선별한 것 같다. 아무래도 리얼리티 쇼이니까) 타일러의 만남이고 다른 하나는 타일러 헨리의 어머니인 테리사의 어린 시절 미스터리를 푸는 이야기이다. 타일러 헨리는 현재(아마도?) 미국에서 상당히 유명한 인사인 것 같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대기자만 30만 명이라니! 한국으로 따지면 한 도시의 인구수 정도가 아닌가! 헐리우드의 많은 스타들도 그를 거쳐 갔고, 그때마다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했다니 더욱 흥미롭다. 유튜브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하면 대표적으로 '휘트니 휴스턴'을 만난 영상이 뜬다. 물론, 죽음 이후의 휘트니이다.


제목이 말해 주듯 타일러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아직 이 땅에 남은 '산 자'들을 위해 남기는 메시지를 전해 준다. 이를 '리딩'이라고 했다. 과정은 대략 이러했다. 타일러는 (영상에 따르면) 일정이 있는 날 아침에 의뢰인이 있는 장소로 떠난다. 의뢰인에 대해서는 당연히 어떤 정보도 얻은 적이 없고 따라서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이다. 목적지가 가까워지면 가끔 어떤 계시(?)나 느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가 떠오르거나, 소리가 들리거나 하는 식이다. 그는 의뢰인을 만날 때마다 갈색 노트와 펜을 들고 가는데 본격적으로 '리딩'이 시작되면 낙서를 하듯 펜으로 뭔가를 그린다. 주로 직선, 가끔 어떤 단어나 숫자이다. 그 외에도 의뢰인이 준비한 물건(대체로 죽은 이의 소품)을 만지며 더욱 깊이 소통하기 시작한다. 정말 무엇을 보는 듯 어딘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거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의뢰인들은 타일러 헨리가 전하는 말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충격을 받기도 하고 때로 오열을 하기도 한다. 그가 하는 말이 '너무도 디테일하고 정확해서'이다. 어떤 사람들은 웃음을 짓거나 눈물을 흘리거나 가끔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오랫동안 말을 잇지 못하기도 한다. 이 모든 상황들을 타일러는 진중하게 응시하며 기다린다. 그가, 나이에 비해 깊은 눈을 가지게 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참 크고 환한 미소를 가졌다. 어쩜 저리 환하게 웃을까. 그 생각부터 들었다. 그의 능력이 진실이라면,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들이 많았을까. 실제로 학창 시절이 원만치 못했던 것 같다. 십 대 시절에 왕따를 경험하기도 했고, 심리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거쳐 지금에 다다른 듯하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뭔가 특별한 삶을 선사해 주지만, 그만큼 감당해야 하는 몫도 클 것이다. 빛이 밝을수록 어둠도 짙은 것처럼. 타일러는 어머니 테리사와 얽힌 외가 쪽의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한편, 부지런히 의뢰인들을 만나 그들이 듣고 싶어 했던 소중한 사람들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갑작스런 사고로 죽은 아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어느 날 갑자기 운명한 아버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냈으나 생사가 갈린 사촌 형제와 친구까지. 떠난 사람들의 사연도, 남은 사람들의 사연도 그 하나하나가 참으로 각별하고 소중했다. 그것은 타일러의 리딩 엔딩 메시지로 인해 더욱 크게 빛났다.


어머니는 임종 이후에야 알게 되셨다고 해요. 딸인 당신에게 본인이 너무했다고, 그래서 미안하다고.


아드님은 자신을 죽게 만든 사람을 원망하지 않는대요. 분노는 없다고, 그러니 어머니도 행복하시라고.


친구분은, 그 사고는 너무나 슬펐지만 받아들이기로 하셨대요. 여전히 춤을 추고 노래하시네요. 늘 그랬듯.


그 말을 듣는 순간 의뢰인들은 하나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이었을 것이다. 내 소중한 사람이 지금은 평안한지, 잘 있는지, 행복한지. 그리고 나는, 남은 자의 몫을 다하며 잘 살고 있는 것인지, 이런 내가 자랑스러우신 게 맞는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타일러 헨리는 바로 그 역할을 해 주는 듯했다. 그 역시 이 일의 보람을 여기에서 찾았다. 산 사람들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것. 그리고 슬픔을 이겨내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주는 것. 그는 힘든 순간도 있지만, 자신이 이런 능력을 가지고 이런 일을 하게 된 것을 운명이자 사명으로 여기고 있었다.


물론, 그와 그가 하는 일에 대한 다른 시각도 존재할 것이다. 당장 유튜브에도 '헐리우드 영매(타일러 헨리)는 전부 거짓'이라며 이를 증명하고자 하는 영상이 올라와 있다. 이에 대한 댓글도 5천 개가 넘게 달려 있다. 갑론을박이 당연한 주제이다. 이를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글쎄, 현재로서는 진실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그에 대해 안 지 얼마 안 되었고 영상도 몇 개 안 본 상태이니 이렇다 저렇다 판단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물론, <타일러 헨리: 죽음 너머를 읽다>를 보면 그대로 믿기가 쉽다. 아니, 믿고 싶어진다. 진실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너무도 뜨겁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진짜일 수도, 가짜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을 믿든 그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일 테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믿는 대상의 진실성 여부'와 '믿음'이 의외로 큰 관련이 없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때로 믿음의 대상이 거짓으로 밝혀져도 이를 부인하고 끝까지 진실이라 믿는 이들이 목도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타일러 헨리의 이야기도 누군가는 재미를 가미한 흥미로운 '',  누군가는 지극히 감동적인 진실된 '리얼리티' 읽을 것이다. 나는, 가능하다면 후자로 읽고 싶었다. 가짜일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진짜로 믿고 싶다. 진실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의뢰인들이, 그의  한마디에 보이던 미소와 안심이 아주 크게 남았기 때문이다. 무엇으로도 바꿀  없는 평안과 행복 말이다.  얼굴을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론 진실은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진실이 아니어도 괜찮다'


위험한 발상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가끔 어떤 꿈은 깨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안부는 오직 꿈에서밖에는 들을 수가 없으니. 오래 안부를 듣지 못한 몇 사람들이 떠오른다. 누군가에게나 그런 존재가 한 명쯤은 있을 것이다. 그 소중함을 떠나고서야 더욱 깊이 깨닫게 된 남겨진 사람들. 잘 있겠지 하다가도 정말일까 싶어 누군가에게라도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정말로, 잘 있느냐고. 정말로, 평안하느냐고. 이제는 아프지 않으냐고. 확인받고 싶은 것이다. 그 확인의 한 마디가 때로는 한 인생을 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하나의 구원일 수 있겠다. 모든 '사실'이 '진실'은 아니지만, 때로는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도, 충분히 위로받았다. 진정으로 Healing Time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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