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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15. 2022

네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고양이 '네로'를 만난 날에 관한 짧은 기록


어느 날 갑자기 시골집에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고양이 '네로'다. 고양이? 네로?? 언제? 언제부터?? 엊그제부터. 정확히는 아부지 생신이었던 얼마 전 주말부터.


아부지 생신을 맞아 오랜만에 오빠네 가족까지 온 식구가 모였다. (그래 봤자 오빠네 식구에 나를 하나 더한...) 기념 식사를 어디서 할까요 하는 오빠의 물음에 아부지는 언젠가 아부지, 엄니, 나까지 셋이서 우연히 들러 맛나게 먹었던 닭갈비집에 가자고 하셨다. 나는 오전에 일을 보고 점심 무렵 아예 닭갈비집 근처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그러면서 아부지는 차를 두 대를 굴릴 게 아니라 시골집 차인 스타렉스 하나에 다 같이 타고 가자고 하셨다. 좋지요. 가면, 오랜만에 막걸리도 드시고 싶다고 하셨다. 아, 좋지요. 근데 이제 그러면 돌아오는 길은 내가 운전을 해야 하는... 오빠도 할 수는 있지만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하는... 아부지, 엄니, 오빠, 언니 그리고 올망졸망 귀염둥이 조카 율이와 린이까지... 내 목숨은 대충 어떻게 된다 해도 이들의 목숨까지 짊어지고 운전을 해야 하다니...! 나 같은 '소심자'는 절대 버스 운전이나 비행기 조종은 다시 태어나도 못하겠구나... 다음 생 진로 고민을 이렇게 덜어간다.


아무튼 닭갈비집에 가서 맛나게 먹고 아부지 술도   걸치시고 사진도 찍고 근처 절도 구경하고 돌아오는 .  우당탕탕이었지만 (창문  손잡이를  부여잡은  한사코 놓지 못하던 오빠...  봤습니다...) 잠든 린이가  깼으니 이것으로 운전 실력 인정?! 그렇게 모두 낮잠에 들거나 TV 보거나 하며 한가롭게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는데   마당에 놀러 나갔던 율이가 우당탕탕 뛰어들어왔다. 고모고모고못! 고양이가 있어요! 이름은 네로래요! 네로가 있어요!!! 한껏 흥분한 율이의 목소리를 따라 뛰어나가 보니 정말로 고양이  마리가  멀리 꼬리를 보이며 내빼고 있다. 어어어? 가지 ! 가지 ! 율이가 다급히 쫓아갔지만 그새 어디론가 숨어버린 후였다. 멀리서 아부지가 야단이셨다. 에헤이! 사람 소리가 너무 도망 가지! 살금살금 먹을 것만 놓고 모른 척해야 !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부지가 던져 주셨음직한 간식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때부터 네로와 우리들의 숨바꼭질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다가가면 네로는 줄행랑을 놓고, 우리가 사라지면 다시 어디선가 살금살금 다가와 놓아 둔 물을 먹었다. 나는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네로를 염탐하면서 율이에게 물었다. 율아, 근데 왜 고양이 이름이 네로야? 모르겠어요. 할아버지가 네로라고 하셨어요. 나중에 엄니께 이 말씀을 드리니 '금세 생각나는 대로 갖다 붙인 이름이지 뭐' 하셨다. 옆에서 듣던 율이가 끼어들었다. 할머니! 옛날에 다른 고양이 '옐로'도 있었대요! 언젠가 시골집에 자주 들르던 노란색 뚱냥이를 아주 애지중지하며 밥을 주시던 아부지는 그 아이의 이름도 '옐로'라고 하셨다. 어느 날부터인가 다시는 오지 않던 옐로. 그래도 아부지는 혹시나 하며 오랫동안 옐로 밥을 다시 내어 놓곤 하셨다.


부모님 두 분 다 동물을 사랑하시지만, 엄니는 고양이를 약간 무서워하신다. 고양이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이 있으신 듯했다. 엄니, 고양이도 강아지도 다 같은 털 있는 동물이고 요즘에는 집에서 고양이도 아주 많이들 키워요. 제 친구 연이네도 벌써 2년 되었는데요? 까맣게 턱시도 입은 것처럼 멋진 고양이 키운다니까요? 아이, 그래도 난 고양이는 무서워. 왜요? 옛날부터 고양이는 영물이라고 했거든. 아이, 그게 언제적이에요. 아이, 몰라... 그럼 옐로 때는 괜찮으셨어요? 그건 늬 아부지가 멀리서 밥만 놓아주고 그랬으니까 괜찮았지! 걔는 우리 집 마당까지 오지도 않았어. 멀리서 밥만 먹고 갔지. 아, 그랬군요.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엄니도 은근히 네로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쩌다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한 눈치셨다. 율이는 아무래도 네로가 시골집 대문 근처 어두운 구석에 자리를 잡은 것 같다고 했지만 어른들은 에이, 설마 이 안까지 오겠어? 라며 믿지 않았다. 그렇게 저녁이 되어 다들 아쉬운 이별을 하고 각자의 집으로 흩어졌다.


그랬는데, 어제 오후 즈음 가족 단톡방에 사진 한 장이 올라왔다. 엄니가 보내신 것이었다. 네로는 이제 우리 식구가 된 듯~ 가지도 않고 집 안쪽 구석에 들어앉아 있어서 장군이 밥그릇에 물이랑 같이 주고 있어~ 에궁~^^ 어떻게 찍으셨는지 장군이가 쓰던 밥그릇을 앞에 놓고 날카로운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는 네로의 사진이었다. 사진과 함께 전송된 엄니의 문자 '에궁' 뒤에 웃음 표시가 달려 있다. 아유 나는 이제 몰라. 근데 어쩌겠어. 도망가지 않으니 그럼 밥을 주어야지 하는 뜻이겠다. 그리고 장군이 밥그릇. 애지중지 키우며 십 년 넘게 우리 집 막내 노릇을 했던 강아지 장군이가 불의의 사고로 떠나고 9년 가까이 한 번도 꺼내보지 않으셨던 하얀 밥그릇. 그걸 찾아다가 우당탕탕 밥을 주고 물을 주고 고양이에 대해서 또 한참을 찾아보셨겠지. 노부부 두 분이서. 고양이는 강아지와 뭐가 다른가. 이걸 줘도 되나. 필요한 건 뭔가. 당장 전화를 해 자초지종을 여쭈어 보니 글쎄 우리가 떠나온 그날 밤 늦게 왔는지 어쨌는지 다음 날 나가 보니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길래 물을 주고 멀찍이서 보셨단다. 그날도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이 되자 다시 집 근처로 찾아왔고 그렇게 네로는 시골집 구석에 둥지를 틀었다. 율이 말이 맞았던 것이다. 대문 근처 으슥한 자리에 가 보니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고. 율아, 미안해 너의 영민한 눈을 우리가 미처 모르고 못 믿었구나.


그럼 이제 네로 키우시는 거예요? 내 물음에 전화 건너편 엄니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밝으시다. 아니, 글쎄 모르지. 워낙 길고양이라 우리한테 정을 줄까? 옐로처럼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르지.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부지는 엄청 애지중지하시죠? 아유, 말도 못 해. 아주 지극정성이야. 엄니랑 나는 둘이 깔깔대며 웃었다. 모든 숨 붙은 것들을 사랑하시는 아부지는, 어미 새가 빈 공구 상자에 낳아 놓고 간 알들도 아주 애지중지하며 돌보셨다. 그래서 결국 부화한 아기 새들을 보고 율이와 린이가 또 아주 신이 났었다. 네로가 그새 흐트러 놓은 각종 비닐과 상자들을 새벽부터 말끔히 청소하시고, 어제 저녁에는 비가 올 것 같아 일찍 집 안쪽 문을 닫으시며 네로야, 네로야 이놈아 얼른 들어와! 를 외치셨다고. 그랬더니 네로는 정말로 쏙 들어왔다고 한다. 네로 사진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주 잘생겼는데요? 미묘(美猫)라고 하니 엄니께서 에궁~ 하는 이모티콘을 보내셨다.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두 분 다 네로가 있는 동안은 또 지극정성으로 돌보시겠지.


이렇게 시골집 식구가 하나 더 늘었다. 어제 저녁에는 모기장을 치고 바깥으로 문을 열어놓고 있으려니 도도도도 와서 한참 집 안을 들여다보고 갔다고 한다. 낯선 게 많이 사라졌나 봐 하시는 엄니 목소리에 반가움이 깃들어 있다. 그런 것 같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는데, 이 말씀을 드린다는 걸 깜박했다.


엄니, 근데 이름 붙여 주었으면 끝난 거 같아요. 김춘수 시인도 그러셨잖아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우리에게로 와서 네로는 이미 네로가 된 것 아닐까요? 그럼 식구죠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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