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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l 13. 2022

여름, 친애하는 풍경

2022년 어느 여름날에 관한 짧은 기록


#1 비 오는 여름날 아침

비 오는 소리에 잠을 깼다. 아침 여덟 시.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일주일에 두어 번만 직장인이 되는 이상스런 삶이다. 아이들이 예뻐 매일매일 보고 싶다가도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이 되면 깊은 숨을 내쉬는 것처럼 편안한 마음이 된다. 이상스런 마음이다. 폭발할 듯 더웠다가 가을처럼 시원해지는 이상스런 여름을, 나는 그래서 좋아하고 있나 보다. 


여름을 오래도록 좋아하고 있다. 


정오 즈음되면 그칠 줄 알았는데 여전히 비가 온다. 여름 한낮에 내리는 비는 어쩐지 좀 애틋하다. 선명했던 풍경들을 아스라하게 흩트려 놓기 때문일까. 툭툭 무심하게 부딪히는 빗소리도 어쩐지 문만 두드리다 떠나는 손님 같다. 애써 멀리서 찾아왔으면서 내다보기도 전에 떠나버리는 그런 사람처럼. 


이렇게 종일 비가 오는 날이면 나처럼 어디선가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 싶다. 요 며칠 날이 더워 밤이 이슥해서야 산책을 나가 보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강아지들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낮에는 숨죽여 있다가 뜨거운 시간대를 피해 그제서야 밖으로 나온 사람들이 서로를 스치며 서로에게 놀라던 여름밤 풍경. 


#2 달리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집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의 목소리가 빗소리처럼 몽글몽글하다. 주무셨어요? 하니 아니, 이제 막 누웠어 하신다. 주무실 거예요? 응... 근데 괜찮아, 얘기해... 안 괜찮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하시니 믿을 수가 없다. 벌써 몸의 반은 꿈나라 기차에 올라타신 것 같은데? 여차하면 내 전화조차 꿈이라고 생각하실 것 같다. 이런 걸 한여름 낮의 꿈이라고 하나? 달리 할 말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괜히 금방 끊기는 아쉬워 '비가 와요'라고 했다. 그렇구나. 거기서부터 여기로 내려 온대. 비가요? 응, 비가. 아, 비가 내려가는구나. 그럼 여기에서 '간' 비를 그곳에서는 '온다'고 하겠구나. 몇 마디 더 시답잖은 말들을 중얼거리다가 끝인사를 했다.


그럼, 주무세요. 끊을게요.

그래, 이따 통화하자. 


괜히 할 말이 없을 때는 왜 꼭 날씨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걸까. 고개만 돌리면 하늘을 볼 수 있어서일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어색하게 아하하 웃으며 '오늘 날씨가 참 좋네요' 하거나, 이메일 서두에 괜히 '날씨가 많이 무더워졌습니다. 여름철 건강은 어떠신지요' 하며 붓글씨를 쓰듯 한 자 한 자 적었던 날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러겠지. 죽는 날까지 날씨 이야기를 못해도 오천 번은 하겠지. 그러고 보면 인간 사이의 화제란 얼마나 소소하고 거대한 것인가. 매우 작은데 매우 크고, 무척 많은데 무척 적다. 이마저도 이상스럽다. 


#3 똑같이 걸어도 

지난달인가. 꼬박 하루를 엄마와 함께 움직인 날이 있다. 아침에 같이 산책을 하고, 점심에 장을 보고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평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얘, 너는 몇 걸음 나왔니? 엄마의 취미는 그날의 걸음 수 확인이다. 얘, 난 오늘도 만 보가 넘었어. 에그, 오늘은 오천 보밖에 안 돼. 엄마와의 통화에는 꼭 걸음 수 보고가 들어간다. 내 걸음 확인도 필수이다. 나는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걸음 수가 획기적으로 적어서 무려 백 보에 못 미칠 때도 있다. 그러면 엄마는 어머어머, 얘 빨리 밖에 나가서 한 바퀴 돌고 와! 하신다. 그러면 나는 누운 채로 뒹굴거리며 변명을 한다. 휴대전화를 들고 걸어야 걸음 수가 올라가잖아요? 근데 집에서는 그러기가 쉽지 않으니까 제 실제 걸음 수는 좀 더 많을 거예요. 설마 백 보는 넘겠죠...! 음, 비겁한 변명이다. 


아무튼 그날도 서로 걸음 수를 확인하는데 어째 내가 만 보, 엄마가 만 이천 보다. 엥? 왜 엄마가 훨씬 많으시죠? 엄마가 아하하 웃으시더니 그러신다. 내 다리가 너보다 짧아서 그런가 봐. 엥? 그게 영향이 있나? 콤파스가 짧으니까 더 부지런히 움직이나 보지. 아, 그런가요? 똑같이 걸어도 항상 늬 아빠보다 내 걸음 수가 훨씬 많은 걸. 아하...!


자그마한 키로 바지런히 움직이는 엄마의 여름을 상상해 본다. 


#4 구기대회 우당탕

요즘 학교는 구기대회 중이다. 남자는 축구, 여자는 피구. 시험이 끝난 다음 날부터 예선, 본선, 준결승, 결승 토너먼트로 진행되고 있다. 시험 때는 거의 죽어가던(?) 아이들이 아주 쌩쌩하게 날아다닌다. 평소에는 거의 아슬아슬하게 뛰어들어오던 지각쟁이 친구들도, 구기대회에는 결코 늦지 않는다. 엊그제는 비를 피해 무려 오전 7시 50분에 시합이 시작되었는데, 2002 월드컵이 부럽지 않았다. 목청껏 '우리 반'을 응원하느라 운동장이 떠나간다. 아슬아슬하게 지면 분통도 터뜨리고, 이기면 우렁차게 기뻐하고. 날 것의 기쁨과 슬픔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줄 아는 열여덟들이 참 예쁘다. 


시합이 끝나면 얼굴이 벌겋게 익은 아이들이 교무실로 우당탕탕 뛰어들어 온다. 쌤쌤! 냉장고 좀 빌려도 괜찮을까요? 한아름 얼음컵을 들고 오는 아이. 쌤쌤! 냉동실에 좀 부탁드립니다아! 아이스크림 세 개를 들고 와 넉살 좋게 외치는 아이. 그러면서 몇 번이고 다짐하듯 말한다. 쌤! 이거 2학년 C반 김OO 꺼라고 꼭 얘기해 주세요! 나는 잊어버릴까 봐 또 메모지에 적어 놓는다. 2학년 C반 김OO 소다맛 아이스크림 3개 냉동실. 덕분에 교무실 냉장고가 미어터진다.  


어제 퇴근하려고 교무실 문을 나서는데 구기대회 대진판이 교무실 앞에 비스듬히 놓여 있다. 2학년 A반부터 I반까지의 대진 결과가 토너먼트 표를 따라 오르락내리락 접전이다. 내가 들어가는 B반이 결승까지 올랐다. 괜히 두근두근한다. 아이들이 자라서 서른여덟쯤 되면 열여덟의 구기대회 정도야 까맣게 잊어버릴지도 모르겠지만- 땡볕 아래에서도 비바람 속에서도 나는 듯 뛰었던 어떤 순간들은 몸과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겠지. 비스듬한 대진판을 바르게 고쳐 놓고 발걸음을 떼었다. 운동장에는 여전히 둥그런 공들이 휙휙 날아다니며 한여름을 가르고 있었다. 


여름, 내가 친애하는 풍경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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