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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Aug 29. 2022

그날만큼은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네 가족이 놀다 간 날에 관한 짧은 기록


어렸을 적엔 이해할 수 없는 풍경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엄마는 왜 저런 말씀을 하실까. 아빠는 왜 저런 행동을 하실까.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저 내 감정에만 충실해도 좋았던 어린 시절이 지나고, 청소년기로 접어들자 가끔씩은 숨겨야 하고 모두 다 내보이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마음들이 생겨났다. 이들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지 몰라서 하루에도 여러 번 이름을 붙였다 떼었다 하며 소란스럽게 굴었다. 그렇게 매양 안달을 내던 시간들마저도 지나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다가온 것은 스무 살 청춘이었다. 스무 살은 어쩌면 이름마저 스무 살인 걸까. 사랑인 줄도 모르고 사랑을 하고, 이별인 줄도 모르고 이별을 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가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뒤로 뒤로 밀려나는 어느 계절의 풍경처럼- 점점 더 아스라해진다. 모든 것들이.


8월의 초입에 오빠네 가족이 집에 놀러 왔다. 오빠네가 잠시 한국을 떠나 있는 사이 나는 이사를 했다. 그러니까 새로운 집으로는 다들 처음 오는 셈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집안을 정돈하고 구석구석 쓸고 닦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나 혼자서는 괜히 좀 어색할 것 같아서(왜죠?) 긴급하게 엄마를 모셨다. 시골에서 흔쾌히 달려오신 엄마. 근데 이제 백팩에 벽돌 10장 무게의 음식들을 가득 챙겨서. 식사는 시켜 먹거나 나가 먹으면 되니 제에발 빈손으로 오시라 해도 꼭 이렇게 뭔가를 잔뜩 들고 오신다. 왜 엄마들은.


아잇, 이게 다 무엇입니까! 지하철역까지 마중을 나가 얼른 건네받으며 안 그래도 미니미한 키가 2센티씩은 줄어드신다며 성화를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커다란 가방에다가 호박에 부침가루에 고기에 상추에 각종 밑반찬과 '젤리뽀'까지(왜죠?) 두 봉을 넣어오셨다. 아닛! 젤리뽀는 왜요! ...라면서 일단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니가 좋아하잖아. 아니 여기에도 파는데요 하면서 하나를 더 까서 입에 넣었다. 그렇다. 나는 젤리를 좋아한다. 세 살부터 좋아했으니까 삼십 년이 훌쩍 넘었다. 뭐요. 왜요. 좋아할 수도 있죠.  


엄마는 그렇게 아침부터 일찌감치 호박전을 부치고 고기를 굽고 상추를 씻어 한가득 상을 차려 놓으셨다. 나는 괜히 허둥거리며  도움이 되지 않는 1인이자 집의 주인으로서 부엌을 들락거렸다. 점심때가 되어 오빠네가 도착했다. 베란다로 내다보았다.  아래 까만 차가 도착하고 문이 열리더니 옹기종기  식구가 내렸다. 오빠는 내게 주기로  레이저 프린터를 안고 언니는 양손에 뭔가를 바리바리 들었다. 조카 둘이 퐁퐁퐁 뛰어 온다. -, 높은 곳에서 마치 과거나 미래를 보듯 한참 동안  있었다. 왁자한 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식구들이 들어왔다. 여기구만. 언제나처럼 별다른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오는 오빠와 어머, 집이 환해요! 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하는 언니. 끼야악 하고 까불까불 반가움을 표시하는  조카 녀석.  고요하던 집이 모처럼 사람들의 목소리로 북적인다.


율이는 그새 부쩍 컸다. 벌써 아홉 살이다. 배우고 싶은 것도, 알고 싶은 것도 많은 나이. 나보다 열 배는 열심히 사는 친구이다. 이것저것 하는 게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좀 줄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면 울상을 하며 안 된다고 한다. 이것도 재미있고 저것도 좋아서 도저히 그만둘 게 없다고. 어버이날 부모님께 쓰는 편지에서 '이렇게 생명을 주셔서 너무 감사하다'라고 썼단다. 오, 생각이 많아지는 문구이다. 행복하게 크고 있는 것 같아서 반갑고 기쁘다. 살아가며 근심과 걱정이 없을 수는 없지만 지금처럼 행복한 기억을 많이많이 쌓아서 힘들 때마다 행복했던 날들의 기억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고모네 집에 놀러 온 것도 그중 하나의 풍경이 되었으면.


린이는 다섯 살이 되었다. 가끔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고 떼를 쓰기도 하지만 많이 의젓해졌다고. 내 침대 위에 올라가 퐁퐁 뛰는 걸 좋아한다. 갑자기 사라져서 보면 뛰고 있고, 잡아다가 간식을 주고 간신히 달래 놓으면 조금 있다가 또 사라진다. 여지없이 퐁퐁 뛰는 중이다. 나도 그랬다. 누구네 집에 놀러 가면 왜 그렇게 침대에서 뛰고 싶던지. 주변에서 만류를 해도 잠시뿐. 땀을 뻘뻘 흘리며 침대에서 뛰었다. 그때의 내가 어른이 되어 린이를 진정시키고 있으니 역시 시간은 돌고 도는 게 틀림없다. 언젠가 어른이 된 린이가 한창 뛰는 아이들 옆을 지키며 이따금 물을 주고 쉬엄쉬엄 하라고 달래는 풍경을 상상해 본다. 이 작은 아이가 어른이 될 때까지 이 세상이 아주 어두워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바람은 늘 멀리 있지만.


복닥이며 점심을 먹고 커피 한 잔을 하고 아이들은 TV를 본다 노래를 부른다 시끌벅적 오후를 지났다. 저녁이 되어 치킨까지 맛있게 시켜 먹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키며 떠나간 뒤이다. 엄마도 오빠네 차를 타고 율이네로 들어가셨다. 드디어 혼자가 된 시간. 가뿐하게 설거지를 하고 뒷정리까지 끝낸 후 침대에 누웠다. 린이가 한참을 뛰며 놀던 자리다. 평소처럼 조용히 누워 있는데 괜히 침대가 퐁퐁 움직이며 일렁이는 듯하다. 자기의 무게만큼 퐁퐁 뛰어오르던 린이. 그 옆에서 율이는 뭐가 속상한지 조금 울기도 했다. 왜 울어 하니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아직은 너의 슬픔이 설명할 수 있는 것이라서 참 다행이야. 나중에 율이와 린이가 한참을 더 큰 후에 이따금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에 휩싸일 때- 엄마나 아빠보다는 조금 더 멀리 있어서 조금 더 안전한 나를 찾아와 준다면, 적당히 따스하고 안온한 자리가 되어 쉬었다 가라고 해 주고 싶다.


유달리 끈끈한 가족을 만나 여러 날 여러 번 불려 다니면서도 늘 도망치듯 부리나케 혼자만의 시간 속으로 달려 나오기 바빴는데- 그날만큼은 뭔가 좀 이해할 수 있었다. 다 같이 모여 왁자하게 떠들고 한 끼를 나누어 먹고 아이들의 별 것 아닌 재롱에 웃고 별 것 아닌 눈물에 심각해지며 괜히 저 먼 미래를 떠올려 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한 시절을 보낸다는 게 무엇인지. 우리 인간들이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린이가 한참을 뛰다 간 자리 위에서, 율이가 엎어져 우엥- 하고 울었던 공간 안에서 홀로 보내는 밤이 다른 날보다 조금은 더 긴 듯도 했다. 나는 내가 만남보다 이별에 더 능숙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을까. 밤이 깊어 잘 들어갔는지, 가서 바로 잤는지 더 놀다 잤는지 괜히 전화를 걸어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시시콜콜하게 수다를 떨고 다시 자리에 누웠을 때- 잔잔한 고요가 뭔가 심심하고 재미없게 느껴져서 괜히 한번 가족,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밤바람이 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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