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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Sep 04. 2022

언제나 첫날은 조금 그래요

가을의 첫날, 첫 시작에 관한 짧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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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은 여름의 끝이자 가을의 시작이자 풀타임 근무의 첫날이었다.

전날 가까스로 잠에 들었는데 중간에 여러 번 깼다. 깰 때마다 시계를 보았는데 아슬아슬하게 남은 시간 때문에 더 속이 탔다. 모든 첫날들에는 이런 긴장감이 서리는 거겠지. 나만 이런 건 아닐 거야. 어둠 속에서 물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십 년째 신입이지만 괜찮아. 괜찮지 않을 때일수록 이런 말을 많이 해 줘야 한다. 그러면 괜찮지 않음이 더 선명하게 느껴지고, 어느 순간 약간 포기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제법 괜찮은 방법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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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날보다 더 일찍 집을 나섰다. 2층 교무실에 놓아둔 몇 가지 짐들을 새롭게 배정받은 자리로 옮겨야 한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있으려니 부장님이 오셨다. 어머, 이제 진짜 가시네요. 네에- 부장님. 가신다니 아쉬워요. 억, 부장님 저도 너무 아쉬워요. 이동이 정해지고 벌써 여러 번 인사를 나누었지만 그때마다 아쉬움이 더해진다. 지난 3월, 잔뜩 긴장한 채로 첫 출근한 날 편안하게 지내라며 살갑게 대해주신 선생님들. 그 덕분에 무사히 지난 계절들을 살 수 있었다. 오전 수업만 있는 시간 강사라 점심 신청을 따로 안 한 사실을 알고, 매일같이 빵이며 음료며 이따금 부식으로 나오는 맛난 간식들을 잔뜩 챙겨주신 마음들. 그 덕분에 내내 따뜻했다. 나는 이렇게 여전히 내 힘이 아닌 타인의 힘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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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도착한 3층 새 자리는 볕이 잘 드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시는 새로운 동료 선생님들. 한 학기 동안 잘 지내봅시다! 갑작스럽게 맞이한 새 동료가 어색하고 부담스러우실 만도 한데 그런 기색 하나 없이 반겨주셨다. 낯설고 어색해 뚝딱거리면서도 열심히 인사를 했다. 자리에 앉아 인수인계 파일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업무 사이트도 들락거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 순간이었다. 2층 선생님들께서 파운드케이크를 사 들고 나를 응원하러 올라오셨다. 정말 깜짝 놀랐다. 한창 수업 준비로 바쁘실 시간인데 다 같이 오셔서 엄샘을 잘 부탁한다고 한 목소리로 말씀해 주셨다. 괜히 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후의를 입어도 되는지. 하늘도 그렇고 계절도 그렇고 마음도 참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오늘 '뭔가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추상적인 행위가 어떻게 눈앞에 형상화되는지를 잠시나마 본 것 같았다. 마음이 내내 일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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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수업은 총 3차시였다. 주로 맡았던 2학년 교실과 거리가 멀어져 종이 치자마자 뛰었는데 조금 늦었다. 더 빨리 출발해야겠다. 3학년 수업은 처음이라 꽤 긴장했는데 역시나 이 학교에 3년째 재학 중인 노련한 학생 선배님들께서 유유히 맞아 주셨다. 2학기인 만큼 아이들은! 새로운 교사에게! 일절 관심이 없었다. 음, 다행인 건가? 그렇게 우당탕탕 수업이 끝나고 한숨 돌리자마자 점심시간이 시작되었다. 오늘부터는 점심 신청이 되어 있어 식당에 가서 밥을 먹을 수 있었다. 학교에 온 후로 처음이었는데 정말 맛있었다. 아, 이거 너무 많이 담았나? 라는 생각도 잠시. 한 톨도 남김없이 싹싹 긁어먹었다. 어느 정도였냐면, 주변 선생님들께서 훌륭하다며 칭찬해 주셨다. 이런 모습은 학생들이 좀 본받아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수업이 아닌, 업무 역량이 아닌 '잔반 없는 식판'으로 첫날부터 칭찬받은 나! 자랑스럽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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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다 끝난 오후. 업무 편람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2학년 B반 연호가 바쁘게 걸어왔는지 숨이 찬 모습으로 3층 교무실에 나타났다. 아니, 쌤! 언제 자리를 옮기신 거예요? 어머! 여기까지 어떻게 왔니? 2층 갔더니 쌤 여기 계신다고 해서요. 어머, 그렇구나. 이거 제출하려고요! 지난주에 걷은 활동지였다. 코로나 때문에 개학 후 일주일이나 학교에 못 온 연호는 그 때문에 과제며 활동지 제출이 이래저래 밀렸더랬다. 마침 내일이 수업이라 가서 받을 생각이었는데 먼저 찾아온 것이다. 활동지 앞장에 포스트잇을 붙이고 '2학년 B반 김연호'라고 야무지게도 써 놓았다. 다른 손에도 뭐가 있길래 그건 뭐니 했더니 아, 이건 수학이요! 했다. 아이고, 고생이네! 아씨, 코로나 진짜 싫어요! 툴툴. 학교 오는 것도,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 마음에 열심히 수업을 듣는 것도 모두 좋아하고 잘하는 연호에게 코로나로 쉰 일주일은 아주 힘든 시간이었을 테다. 앞장에 확인 도장을 찍고, 포스트잇을 살짝 들어 간단히 응원 메시지를 적고 다시 포스트잇으로 덮어 두었다.


아이들을 보면, 힘이 난다. 그래, 수업이 좀 망하고 업무가 좀 안 된 날에도 아이들 보고 다시 힘을 내는 것이겠지. 어디에나 그 나름의 고충은 있고 괴로움도 존재하겠지. 하지만 이를 무력화시키는 무엇인가도 반드시 존재할 테다. 그것을 발견하고 그 힘으로 또 하루를 살아서 다들 지금 여기 이 순간까지 왔으리라. 안녕히 계세요, 하고 교실 문을 나서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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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무사히 살아남은 기념으로 지하철 역사 내에서 빵 하나와 커피 하나를 주문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아무래도 처음인지 허둥지둥 조금 긴장하신 것 같다. 천천히 하세요 하니 앗, 감사합니다! 한다. 커피에 빨대를 꽂아 주시려고 빨대 비닐 끝을 잡고 당기는데 왠지 잘 안 되는 모양. 낑낑대다가 아휴 죄송합니다 한다. 앗, 괜찮습니다! 제가 꽂을게요. 서로 마주 보고 쑥스럽게 웃었다. 말은 안 했지만 저도 오늘이 첫날이에요.


언제나 어디에서나 첫날은 조금 그래요. 누구나 그랬겠죠. 바보 같고 멍청하게만 보이는 나 때문에 괴롭고, 내 존재 자체가 민폐 같기도 하고요. 잘하고 싶은데 의욕만 앞서 우당탕탕 모든 걸 어그러뜨리는 순간에는 얼굴이 달아오르다 못해 그만 사라지고 싶을 테죠. 게다가 저는 십 년째 그런 신입의 상태랍니다. 에잇, 근데 뭐 어쩌겠어요. 원래 처음이란 건 그런 거죠. 처음부터 다 잘하면 왜 살겠어요. 사는 일이 곧 배우는 일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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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부터 이러는 게 좀 그렇지만, 어서 빨리 추석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 나만 이런 건 아니겠지. 시작은 가을의 첫날에 했는데, 글을 맺고 나니 9월 하고도 네 번째 날이 되었다. 비가 오다 말다 한다. 생각도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한다.


지금 마음속에 이는 괴로움들도 끝내 그렇게 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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