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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Aug 25. 2022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다니엘 린데만 씨의 공연에 관한 짧은 기록


지난주 수요일, 다니엘 린데만 씨의 재즈 공연에 다녀왔다.


형신이 아니었다면 모르고 지나갔을 연주였다. 오전 11시에 한 시간 정도 공연을 하더라고. 같이 갈래?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누구? 독일 출신 방송인 그분? 그 린데만 씨가 피아노를 연주한다고? 음악을 전공한 사람이었나? 사실 그에 대해 아는 것은 딱 방송에 나온 정도였다. 몇 번인가 TV 프로그램에서 보았고, 그 덕분에 독일 출신 방송인이라는 것과 그가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국의 역사나 사회 문제에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말투나 태도에서 조심성이 많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언뜻 받았지만, 그와 나의 거리는 아주 멀었기 때문에 내 머릿속을 차지한 다른 수많은 생각들에 섞이어 곧 사라지고 말았다. 그랬는데- 그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며 벌써 여러 차례 음반을 내고 공연을 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들으니 무척 흥미로웠다. 결국 나도 같이 가 보기로 했다. 뭐랄까. 마치 아주 오래전 꺼 버린 등불 하나를 다시 켜 들고, 살면서 절대 비추어 볼 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머나먼 풍경을 휘휘 들여다보는 느낌이었다.


형신과 함께 공연장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10시 반. 시작은 11시였지만 장내는 벌써 공연을 보러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공연의 테마는 '재즈'. 오, 마티네 공연에 재즈를? 하긴 시공간을 초월해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다 놓는 게 음악의 일이다. 몸은 대한민국 여름의 오전에 머물러 있어도 어느 순간 음악을 따라 아주 먼 이국 도시의 가을밤에 도착할 수도 있는 것이다. 1층은 진작에 매진되어 2층에 앉았다. 2층 자리도 제법 많이 찼다. 자연스레 '디아츠' 공연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50석, 100석을 채우는 일도 참 쉽지가 않은데- 음악을 하고 있는 형신도 여러 모로 생각이 많아 보였다. 우리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 무대 위의 피아노와 드럼을 응시하며, 수많은 사람들의 설렘과 기대를 목격하며 이따금 서로 눈을 마주쳤다.


우리는 그렇게 눈빛으로 무수한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 좋은 음악을 하고, 좋은 글을 쓰는 것이 물론 가장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의 존재를 아무도 모른다면- 그래서 그저 나 혼자 듣고 나 혼자 읽고 나 혼자 영위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그럼에도 우리는 끝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살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쓰고 싶은 글을 쓰고 부르고 싶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우리 손으로 공연을 올리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며 그렇게 30대를 보냈다. 앞으로는 어떨까. 계속해서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형신도 나도 생각이 많았다. 11시가 되고 공연의 막이 올랐다. 린데만 씨와 함께 움직이는 팀이 있는 것 같았다. 색소폰, 드럼, 베이스 기타와 함께 어우러진 피아노 연주는 마음을 적시기에 충분했다. 내 취향의 곡들은 아니지만 듣는 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어디론가 데려다 주기에는 충분히 훌륭한 연주였다.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피아노 연주가 아닌, 2017년부터 거의 매년 음반을 내고 꾸준히 음악 활동을 한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진심을 다해 몰두하고 용기를 내 도전하고 계속해서 해 나가는 모습이 무척 멋있었다. 형신도 바로 그 부분을 언급했다.


용기 있게 '한다'는 사실.


그것이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지점이었다. 많은 분야가 그렇지만 특히 예술의 경우, 전공자가 아니면 도전 자체가 쉽지 않고 도전한다고 해도 실력이나 결과를 두고 특별히 '엄격한' 평가를 받게 된다. 한국사회의 특징일까. '올바르다고 인정받는' '제대로 된'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하나의 결과가 평가절하되거나 필요 이상으로 비판받는 경우도 왕왕 있다. 여기에는 '예술' 자체의 특성도 한몫하는 것 같지만.


마찬가지로, 집필의 영역도 특별히 발달된 '문단 제도'의 통과 여부에 따라 등단 작가와 그렇지 않은 작가 군단이 '아직도, 여전히, 조금은' 갈리는 듯하다. 물론 <당선, 합격, 계급>과 같은 책을 보면 이 같은 단일화된 경로가 충분히 비판받은 바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이 '브런치'처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자신의 책을 내고 작가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열리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순문학'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이 등단 제도가 유효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문단 밖에 선 자의 착각일까. 착각이라면 다행이다.


다니엘 린데만 씨는 공연에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음반을 모두에게 하나씩 선물했다. 로비에서 그의 음반을 받기 위해 줄을 서며 형신과 나는 '우리도 이런 선물을   있는 여력이 되면 좋겠다' 생각과 ' 그렇게 하자' 다짐을 동시에 했다. '  있을까'라는 의구심은 일단 지우기로 한다. 마음이 있고,  마음을 외면하지 않는  언젠가는 가능할 것이다. 형신도 나도 서로가 가장 사랑하는 일을 취미로만 두려고 했던 시간이 있다.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각자 생계를 꾸리기 위한 일을 하며, 음악이나 글은 그저 취미로 즐기며 그렇게 살았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늦게 유학을 다녀오고 늦게 책을 내고 늦게 힘을 모아 아무도 모르는 공연을 올리며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포기가 되지 않는 일들'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도 형신은 꾸준히 공연을 하고 공부를 하고 음악을 했다. 문제는 나다. 먹고사는 일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글을  만하면 일에 뛰어들고 다시 글이 모일까 하면 일선에 뛰어들어 시간은 흘렀지만 별로 쌓인  없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조금씩 기록을 하고 다시 소설을 쓰고,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자랑스럽다. 아무도 몰라 주어도 아무튼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없는 시간이다. 물론 솔직한 마음으로 지금보다는, 조금은  알려져도 좋겠다. 소망하건대, 글로 먹고살  있었으면 정말 좋겠다. 아직은 수입에서 글로 버는 돈과 교육으로 버는 돈의 비중이 9:91 정도 되는  같다. 그래도 처음 시작할  0:100이었음을 떠올려 보면 나쁘지 않은 성과이다. 퇴사 후 본격적으로 글을 쓰며 살자고 다짐하고 여기까지 오는 만 5년 정도가 걸린 것 같다. 앞으로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좋은 글을 쓰고 싶다. 많은 사람이 읽고  팔리고 그래서 가정 경제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포기하지는 말자. 살아가며 마음은  속상하고 가끔 주눅도 들겠지만 그마저도 내가 안고 가야 하는 일이겠다.  책을  때의 마음으로  번째,  번째도 이어가고 싶다.   사람이라도  책을 보고,  글을 읽고 힘을 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 쉽지 않겠지만 포기하지 않겠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  길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가겠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나아진다. 새삼 이런 마음을 갖게  다니엘 린데만 씨의 공연이  고맙다. <Desert-Candle> 좋았어요.


받은 CD를 집에 와 틀어보았다. 직접 작곡한 곡들의 악보가 앨범 커버에 수록되어 있었다. 멋진 사람이다. 그와 한국은 어떤 인연이기에 이렇게 접점 하나 없는 서로가 만나 한 시절을 보낼 수 있는 것일까.  그가 이 글을 읽을 리는 없겠지만, 언젠가 혹시라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덕분에, 힘들었던 한 시절을 잘 통과할 수 있었다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다. 예술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다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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