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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11. 2022

우리들은 전혀 다른 곳에서 살다가

독립서점


일요일 저녁.


불현듯, 무엇이라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불쑥 올라와 내내 방안을 서성였다.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만 가지 감정들을 적확하게 표현하기에 우리들이 가진 단어란 얼마나 희미하고 허무한가.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나는 우리들이 가진 단어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희미함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했다. 아무래도 표현할 길이 없다.


그런 순간에는 어쨌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안전하다.


걷고 걸어 버스를 탔다. 처음에 나올 때는 정처가 없었지만 걷는 사이 목적지를 정할 수 있었다. 평소 눈여겨봐 두었던 독립서점. 금토일만 여는 까닭에 아차 하면 오픈 시간을 놓쳤던 곳이다. 클로즈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남은 그윽한 시간에 기어코 도착했다. 환하게 불 밝힌 그곳은 내가 당도해야 할 유일한 안식처처럼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너덜거리는 속내. 책에서라면 위안을 얻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주인장은 편히 보시라는 말과 함께 말랑한 과일 젤리를 하나 건넸다. 지구를 구하는 것은 초능력자나 억만장자가 아니라 그냥 말랑한 젤리 하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주머니 속 조약돌을 만지던 소년처럼, 나는 책 사이를 쏘다니는 내내 말랑한 젤리를 손 안에서 굴려 보았다.


서점은 아담하고 따스하고 그리고 안전했다.


내가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 하나가,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는 여자 둘이 더 들어왔다. 우리들은 오늘 전혀 다른 곳에서 절대 알 수 없는 하루를 보냈는데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 시각에 이곳을 생각하고 결국 도착한 걸까요. 나는 그런 게 궁금했다.

그런 생각을 대체 왜 하느냐는 질문은 받지 않겠다. 그런 생각을 해서 대체 뭘 하느냐는 의문에도 답하지 않겠다. 어떤 것의 쓸모란, 아주 나중의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 만일 지금까지 쓸모 있는 것들만 살아남았다면, 이 세상이 얼마나 쓸모없어졌을까. 쓸모없는 것들로 인해 이 세상이 좀 더 쓸모 있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드디어 젤리를 까서 입에 넣었다. 설탕이 촘촘하게 붙은 말랑말랑한 젤리.


고심 끝에 두 권의 책을 골랐다. 대형 서점에 갔더라면 찾기도 힘들고 찾지도 않았을 책이다. 내가 쓴 글들도 어딘가에는 숨죽여 존재하고 있겠지. 모든 숨죽인 존재들이 안녕하기를. 혹여 숨죽여 울고 있는 시간들이 있다면 더욱 안녕하기를.



그것은 품위였다.

그들은 모두 품위와 어느 정도는 완벽한 그들만의 평온함과 긍지가 있었다. 그들은 가난했을지도 모르고 지극히 불안정한 생활 속에서 빠듯하게 생계를 이어갔을지도 모르지만, 품위가 있었다. (...) 그들은 그들을 지나쳐 가는 시간도, 사람도, 힘겨웠던 시절도 뺏어 갈 수 없는 뭔가를, 그들만의 뭔가를 지니고 있었다.

- 루이스 라무르. <소설가의 공부> 89p



아침에 먹으려고 산 빵을 해가 뉘엿하게 비치도록 먹지 못했다. 청소 시간의 소음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어깨를 맞댄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간 시각. 몇 줄의 글을 쓰며 오늘 아침 읽은 책에 밑줄을 긋는다. 다음 주는 온라인 수업 주간이고 내가 모르는 곳에서 아이들은 조금씩 더 자라난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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