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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08. 2022

사랑 그런 거 잘 모르겠지만

자전거 보조 바퀴 뗀 날


그 가족을 본 건 어둠이 짙게 깔린 어느 날 밤이었다. 


평소라면 이미 늦었다고 여겨 산책을 포기했을 시각. 그날따라 좀 걸어도 좋겠다 싶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슬렁슬렁 천변으로 나섰다. 환한 가로등 길 대신 나무들이 촘촘하게 들어서 어둠에 어둠을 더한 흙길을 따라 걸었다. 그냥 이런 길이 당기는 날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뒤에서 삐익- 삑- 하고 두어 번 소심한 경적이 울렸다. 자전거다. 충분히 비켜갈 수 있는 길인데? 오른편으로 비켜 서며 슬쩍 돌아보았다. 앳된 남자아이가 비틀비틀 자전거 바퀴를 굴리고 있다. 아홉 살이나 열 살 즈음 되었을까. 핸들을 잡은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다. 그 뒤로 한 여자가 종종걸음을 치며 부지런히 쫓는다. 아이의 엄마다. 여자는 한 손을 자전거 안장 쪽으로 뻗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내 곁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보조 바퀴를 뗀 날이구나. 


자전거는 비틀거리면서도 용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엄마의 종종걸음도 빨라진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자(母子). 이 길은 앞으로 앞으로 뻗어 있다. 길이 어디까지 닿아 있나 궁금해서 정처 없이 앞으로만 걸어본 적이 있다. 길의 끝에는 또 다른 길이 있었다. 다만, 사거리라 그때부터는 다시 방향을 정해야 했다. 저들 모자는 어디로 갈까. 길의 끝에서 되돌아오려나. 그럼 한 번쯤 다시 스치는 순간이 있으려나 하는데, 빵- 하는 작은 경적 소리와 함께 나를 스쳐가는 무언가가 또 있었다. 


이번에도 자전거. 다시 남자아이. 앞서 간 아이보다 조금 크지 싶다. 노련하게 핸들을 쥐고 엉덩이도 조금씩 들썩들썩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폼이 제법이다. 보조 바퀴 따위는 이미 뗀 지 오래. 그런데도 아이는 천천히, 천천히 페달을 밟는다. 동시에 아이의 앳된 목소리가 가을밤의 잔향처럼 귓가에 오래 남았다. 아이는 잘한다! 잘한다! 외치고 있었다. 


잘한다! 잘한다! 


저 목소리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달리고 있을 동생이다. 이제 막 보조 바퀴를 떼고 걱정 속에서 위태롭게 달리고 있을 동생을 위해서다. 분명 더 빠르게 앞질러 갈 수 있음에도 부러 천천히, 규칙적으로 페달을 밟으며 정해진 만큼만 앞으로 나아가는 일. 절대 앞지르지 않는 일. 그래서 어떻게든 동생의 뒤에서 계속해서 달려 주는 일. 그것이 아이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그리고 탁탁탁탁- 고르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 아이들의 아빠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잘한다! 잘한다! 하는 앳된 목소리의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맨 앞에서 달리고 있는 막내는 오늘을 어떻게 기억할까. 


처음으로 보조 바퀴를 떼고, 비틀비틀 달리면서도 결코 넘어지지 않을 수 있는 여러 방도들을 몸으로 체득했을까. 비로소 마음으로 느꼈을까. 자신의 뒤를 따라 각자의 속도로, '은밀하고 위대하게' 조력하고 있는 가족의 힘을 눈치챘을까.  


이런 가족이라면 넘어질 리가 없다. 넘어지더라도 크게 다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안장에 닿을 듯 말 듯한 엄마의 손, 형의 앳된 응원 그리고 맨 뒤에서 묵묵히 달리던 아빠의 발소리. 뭐, 그런 것들. 사랑, 그런 게 있다면 아마도 이런 순간들에 결국 느끼고 만 감정이 아닐까. 어둠 속에서도 끝내 빛나고 말았던 어떤 순간들. 사랑 그런 거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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