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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Nov 14. 2022

꽃을 들고 뛰어가는 마음

아이들의 첫 책 출간


올봄부터 가을까지  개월 가까이 광진구의  고등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글을 쓰고 책을 만들었다. 정확히는 글쓰기에 대해 강의하고 글을 쓰도록 과제를 주고, 피드백을 하고  결과물로  만드는 일을 도왔다.  11명의 아이들이 함께 시작했고,   8명이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손에 들었다.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눈을 볼 때마다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안에는 어린 날의 내가 있었고, 수줍은 설렘이 있었고, 애타는 사랑과 이른 절망도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한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아이들이었다. 아마도 오랜 낮과 밤 동안 홀로 뭔가를 끼적여 왔을 것이다. 아무도 모르고, 아무에게나 내 보일 수 없는 일을 홀로 돌보며 쓰고 또 썼을 것이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올라와 이런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용기를 내 신청했을 것이다. 그만큼 아이들은 글 앞에서 진지했다.


연진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참여했다. 수중도시에 관한 연진이의 소설을 기억하고 있었던 까닭에 나는 반갑게 맞았다. 작년에도 똑같은 프로그램에 강사로 참여했지만 개인 사정으로 책 출간까지는 보지 못했다. 그래서 연진이가 책을 못 냈다는 사실도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한 번 끝내지 못한 일을 다시 매듭 짓고자 왔을 때 아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만큼 부담도 크고 걱정도 많았을 것이다. 연진이의 글에는 풍부한 상상력이 깃들어 있었고 필력도 좋았다. 다만 서사가 느리게 진행되어 총 여덟 번 남짓 진행되는 수업 내에 완성하기란, 아무래도 무리였다. 작년에도 아마 그래서 끝내지 못했을 것이다. 연진이의 글은 늘 깊은 새벽에 도착했다. 선생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제 보내드립니다. 새벽 너머까지 그렇게 글을 붙들고 있었을 아이. 연진이는 포기하지 않은 끝에 올해 드디어 책을 출간했다. 제목은 <마르고 닳도록>.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다. 대화가 살아 있고 등장인물의 성격이 다채로워 읽고 있노라면 바다에 가 보고 싶어지는 글이다.


다희의 글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의 세계를 그렸지만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고 사람과 세상에 대한 페이소스도 녹아 있었다. 그 안에서 인물들을 자유롭게 놀릴 줄도 알았다. 머지않아 근사한 SF 소설이나 웹소설을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다희도 글을 계속해서 써 나가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하고픈 이야기는 많은데 그 모든 것을 다 담아 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던 탓이다. 어쨌든 정해진 기한이 있었고 우리는 3월에 시작해 11월 초까지는 반드시 책을 만들어 내야 했다. 원래의 계획을 수정해 하나의 이야기가 일단락되는 지점까지 우선 책에 싣기로 최종 결정했다. 나머지 이야기는 아쉽지만 미래의 다희에게 맡기고. 다희는 아쉬운 마음을 작가 후기에 담았다. 제목은 <검은 눈의 세상>. 멋지지 않은가. 나는 그녀와 작가 대 작가로 만날 날을 기다린다.


채원이의 글은 추리소설이었다. 작심하고 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데 문장이 탄탄하고 좋았다. 추리소설답게 눈길이 가는 도입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반전도 있어 흥미진진했다. 제목은 <소랑>. 직접 그린 것인지 붉은 빛의 표지조차 글과 너무나 잘 어울렸다. 아이들의 빛나는 재능을 볼 때마다 가슴이 뛰었다. 이렇게나 반짝이는 하나의 세계를 이토록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니 천운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경탄에 찬 내 반응을 볼 때마다 어쩐지 수그러들고 자신 없어 했다. 선생님, 정말 괜찮을까요? 이대로도요? 정말이다. 정말 그대로도 괜찮았다. 괜찮다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 좋았다. 조금 서툴고 부족한 부분들은 물론 있었지만, 다른 빛나는 장면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한 달에 두 번 금요일 방과후에 시간을 내어 3시간을 꼬박 글을 쓴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 어려운 일을 아이들은 오직 좋아하는 마음 하나로 버티어 냈다.


나는 아이들이 저마다 원하는 장르를 원하는 방식으로 풀어내는 과정을 함께하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내가 직접 쓰는 일도 물론 좋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받아 보는 것도 너무나 가슴 떨리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꿈이, 특히나 글쓰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상상 이상으로 짜릿하고 감동적이었다. 아이들의 글을 읽고 원고 마감을 독촉하고 글이 모이면 점검해 피드백을 하고 제목을 고르고 표지를 선정하고 그리고 중간에 잠수 탄 아이들을 위해 기다리고. 다시 기다리고.


이 모든 과정이 전혀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이겠다. 코로나와 기타 학교 일정으로(게다가 나는 2학기부터 또 다른 학교에서 풀타임으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든 순간이 많았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해냈다. 사실 마지막 수업 때 일부의 친구들은 거의 포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원고량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나마 모인 내용도 별로인 것 같다며 자꾸만 멈추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나는 자주 이런 말을 했다.


"작가가 끝을 내기로 마음먹었으면 바로 그곳이 끝입니다. '완성'이라는 개념도 결국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이번에는 일단 한 발짝만 뗍시다. 우리가 쓰려는 건 장편소설도 아니고, 불후의 명작도 아니니까요. 나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면 됩니다. 그런 점에서는 모두 통과예요. 다들 열심히 썼으니까 이제 마무리만 하면 됩니다. 다 할 수 있어요. 저를 믿으세요."


우습다. 이번 달 원고도 기한을 한참 넘겨 가까스로 보낸 주제에 선생이랍시고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을 볼 때면.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간극을 아주 조금이라도 좁혔다면 그날 하루는 성공이다.


이 말들은 진심이었다. 아마 내가 나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리라. 아이들이 내 보인 걱정과 두려움은 사실 무척이나 낯이 익은 것이었다. 나도, 날마다 부딪히는 벽이었으므로.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는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심한 자기 검열과 자책으로 많은 에너지를 날리던 날들에도 결국 답은 쓰는 것. 쓰고 나서야 무엇을 쓰고자 했는지, 왜 쓸 수밖에 없었는지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바로 이것을 전달하고 싶었다. 공부가 안 될 때의 불안은 공부를 해서 없애는 수밖에 없다. 글을 쓰지 않을 때의 불안은 결국 글을 쓰는 행위로만이 진정할 수가 있다.


연진, 다희, 채원, 정원, 유나, 아진, 태인, 혜림.


이 이름들을 기억할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이름이 박힌 책의 첫 장을 들어 아주 수줍게 내게 편지를 썼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날짜. 이름. 이런 간단한 메시지가 아니라, 편지 말이다. '태주 선생님께'로 시작되는 편지는 첫 페이지의 여백을 한가득 채우기도 했다. 샘 덕분에 끝까지 쓸 수 있었다고, 감사의 말을 전하고 있었다.


그 말이 진심임을 안다. 나 역시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내 글이 하찮고, 별로인 것 같고 재미도 없고 의미는 더더욱 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 여전히 어딘가에는 내 글을 읽고 아주 작은 숨소리라도 보태어 말해 주는 사람들이 있어 계속해서 다음 하루를 기대해 보는 것이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그런 것 같다. 몇 안 되는, 하지만 진심으로 나의 세계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황폐한 하루 속에서도 어쨌든 쓰는 것. 아이들과도 약속했다. 아이들의 이 첫 책을 30년 동안 간직하겠다고. 구름 떼처럼 사람들이 모인 사인회에 들고 가 인증하겠다고. 그때 흑역사라고 부끄러워하지 말고 자랑스러워 하자고. 지금의 이 미약한 시작이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노라 이야기하자고 말이다.


11월 초에 있었던 학술제에서 아이들은 저자와의 만남 시간을 가졌다. 북 트레일러를 만들고 자신의 책을 소개하고 사인회도 열었다. 소속된 학교의 수업을 모두 마치고 가느라 행사가 끝나고도 한참 늦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나를 30분 넘게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늦은 와중에도 소국 여덟 다발을 마련해 들고 뛰었다. 꼭, 꽃을 전해 주고 싶었다. 빛나는 시작을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 잘 전달이 된 것 같다. 왜냐하면 꽃을 흔들며 행사장으로 뛰어 들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아이들과 눈을 마주쳤을 때-


모두의 눈빛이 글썽이듯 반짝이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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