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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Feb 11. 2022

사랑한다는 말이 뭐길래

율이의 생일잔치


율이가 뿌에엥 울었다.

생일을 맞이해 제 엄마 아빠가 쓴 편지, 할머니가 쓴 편지, 고모가 쓴 편지를 읽고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어느 순간 말 그대로 '뿌에엥-'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뿌에엥- 하고 우는 얼굴은 어떤 걸까 궁금했는데 과연 이런 것이로구만! 무릎을 탁 칠 만큼 귀여웠고, 애틋했다.


율이의 아홉 번째 생일이었다.

고모고모고미고밍- 제 생일에 진짜 오시나요??? 설에 스치듯 만난 율이는, 짧은 만남이 주는 섭섭함을 생일잔치에 대한 기대로 달래려는 듯 내게 매달리며 물었다. 얼결에 '그러엄- 고모가 케이크도 사 갈 거야!' 하고 덜컥 약속을 해 버렸다. 아이들에게 약속이란 그런 거다. 새끼손가락을 걸고 도장을 찍고 복사를 한 순간부터 그것이 진짜로 실현되는 날까지 매 순간 설레는 것. 그날, 그 순간만 생각하면 왠지 숙제도 휘리릭 할 수 있을 것 같고, 밥도 한 그릇 뚝딱 먹을 수 있을 것 같고, 형이나 동생이 좀 괴롭혀도 이번만큼은 그래, 내가 좀 양보하지 뭐 하고 대인배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뭐 그런 것. 오직 그날만을 기다리며 이 모든 것들을 슈퍼맨처럼 해치워 왔는데 약속이 안 지켜진다? 무산이 된다? 절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정말 하늘이 무너질 일이다. 나는 괜히 비장한 마음이 되어 미리부터 율이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스누피 편지지까지 준비해 두었다.


당일 오후, 여유롭게 편지를 쓰고 있는데 붕- 하고 메시지가 왔다. 오빠가 재택근무 중이라 이제 고모만 오면 바로 잔치를 시작할 수 있는데 어디쯤이냐는 것이다. 옛? 율이 아부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가면 되겠지 싶어 아직 출발도 안 했는데?! 심지어 나는 케이크 담당이다. 오 마이 갓. 0.5초 만에 뛰쳐나갔다. 제법 큰 파리바게뜨에서 초콜릿 케이크도 샀다. 별 모양 장식이 큼직큼직하게 박힌 반짝이는 초콜릿 케이크. 머리칼을 휘날리며 도착하니 거실 한쪽의 큰 테이블에 각종 과일과 떡들이 차례로 놓이는 중이다. 열 살까지 해 주면 아이가 장수한다는 수수팥떡. 오! 오랜만이다. 나는 별로 안 좋아해서 많이 먹지는 않았지만 울 엄니도 오빠와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매해 수수팥떡을 해 주셨더랬다. 꿀떡과 포도, 딸기, 케이크, 아기자기한 포장지의 선물들까지 나란히 놓이니 제법 풍성한 자리가 되었다. 율이는 아주 수줍어하면서도 모처럼 들썩이는 집안 분위기에 신이 난 것 같았다. 린이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초흥분 상태.


2년 동안 미국에서 생일을 보낸 오빠네 가족은 생일마다 조금 외로웠다고 한다. 워낙 모이기를 좋아하는 집안이라 단출하게 네 식구만 짝짝짝 하는 생일 축하가 어색하고 아쉬웠다고. 물론, 이쪽이나 저쪽이나 코로나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겠다. 그래도 같은 하늘, 같은 시간 속에서 우당탕탕 영상통화도 하고 한 명이라도 더 참석해 박수를 치는 쪽이 좀 더 힘이 되기는 하는가 보다.


그리고- 대망의 선물 개봉 시간. 율이는 테이블에 놓인 선물을 하나하나 열어 보고 환호했다. 그러고는 편지도 읽어 보라는 말에 하나씩 뜯어 또박또박 읽다가 어느 순간 뿌에엥-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뭐야뭐야뭐야??? 왜왜왜?? 다들 깜짝 놀라 후다닥 달려왔다. 너무 감동적이란다. 이제 수월하게 글을 읽을 줄 아는 아홉 살 율이는,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고 분명하게,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나 보다. 린이가 태어나고 하루아침에 언니가 되어 '엄마'부터 시작해 꽤 많은 것을 양보해 온 언니 율이의 울음은 꽤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편지마다 그쳤던 눈물이 다시 터졌기 때문이다.


제가 감동의 바다에 빠졌어요. 저 좀 구해 주세요. 율이가 팔을 벌리며 그러길래 낚싯대를 던져 율이를 구하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꺄르르- 아홉 살다운 웃음이 터졌다.


우리가 쓴 편지의 내용 중 특별한 것은 없었다.

사랑한다는 말, 우리에게 와 주어서 고맙다는 말, 너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기쁨이라는 말 그리고 언제까지고 기댈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 주고 싶다는 말. 모든 어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은 말을 똑같은 순서로 쓴 것 말고는(저작권 침해당한 줄...), 특별한 건 없었다. 율이가 울자 당황한 린이가 눈을 끔벅이다가 도도도도 달려 가 휴지를 들고 왔다. 그리고 자기도 편지 무리에 끼고 싶은지 웬 종이 쪼가리에다가 연필로 기하학적인 무늬 몇 개를 그려 왔다. 언니한테 보내는 편지란다. 무슨 내용이냐고 하니 또박또박 말도 잘한다.


언니, 사랑해. 생일 축하해. 린이가.


율이가 다시, 뿌에엥- 하고 울었음은 물론이다. 율이를 둘러싼 어른들이 이번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안에는 조금씩 글썽이는 마음들이 있었다. 참 정말, 이상도 하지. 사랑한다는 말이 뭐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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