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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l 23. 2023

여름이 지나간다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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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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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인 듯하여 달려 나간 한낮에 여름을 만났고 첫사랑을 마주한 것처럼 두근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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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여름은 그런 계절이다. 첫사랑처럼 은근하고 안온하고 서툴고 그래서 아쉽다. 만나면 정말 잘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해만 나면 비만 오면 모든 걸 줄 수 있을 것처럼 기다렸는데 막상 만나서는 내내 다른 계절 이야기다. 봄이 낫지. 아무렴 가을만 하려고. 그래도 결국엔 겨울이야. 사람의 마음이 이렇다. 그럼에도 여름은 의연하다. 언제나처럼 푸르르고 푸르러서 조금- 아프게 느껴질 때가 있다.


올여름에는 어쩌면 이렇게 아픈 소식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명리학에서 '교사'는 '의사'와 더불어 '활인업'을 택한 이들이라 일컬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활인(活人). 사람을 살린다는 말이다. 사람을 살리려 나선 길 위에서 그만 다 피지 못하고 떠나가는 숨들을 볼 때, 이 시대의 끝을 그려 보게 된다. 한 세상의 종말은 물리적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데서 올 것 같다는 생각. 이 시대의 끝도 그러할 것이다. 환경 파괴, 이상 기후, 자연재해와 구조적 인재, 빈부 격차, 갑질, 특정 소수와 불특정 다수를 향한 폭언과 폭력. 이 모든 사건들 앞에서 그저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오늘도. 살아 있음의 질감을 기쁨보다는 슬픔으로, 평안보다는 안도로 느끼는 오늘이어서 마음이 아프다.


창 밖으로 내내 비가 내린다. 어둑하고 습하다.


-

엊그제 방울토마토를 사려다가 크게 오른 가격을 보고 나도 모르게 참외를 사 버렸다. 나는 참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냥 나오기가 그래서 참외를 샀노라고 하하 웃으며 엄마께 이야기를 했다. 에그, 그냥 사 먹지. 아니에요. 참외도 괜찮아요. 하나를 깎아서 먹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부산하게 나갈 준비를 하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얘, 우리 너희 집으로 출발한다.

예?? 왜요??

아부지가 우리 집에 따 놓은 방울토마토 그거 너 갖다 주신다고.

예?????

태주가 어제 방울토마토를 사려다가 비싸서 못 사 먹었대요 했더니 당장 가신대.

아니, 괜찮...

아부지 벌써 나가셨다, 끊어.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 입이 방정이다. 괜한 말을 해서. 복잡한 마음으로 카페에 가 글을 한 편 쓰고 원고 교정을 보고 점심 무렵 집으로 향했다. 먼저 도착하신 엄마 아부지는 방울토마토에 상추, 밑반찬, 소고기까지 잔뜩 챙겨 오셨다. 으잉? 소고기도 있네요? 얘, 오늘이 중복이잖니. 너 집에 밥 없지? 그럴 줄 알고 밥도 챙겼다. 엄마는 커다란 바구니에서 뭔가를 자꾸 꺼내신다. 얘, 이건 라디초라고 옆집에서 준 건데 비싼 채소야. 호텔에만 들어가는 거란다. 찍어 먹을 소스도 사 왔으니까 버리지 말고 찍어 먹어 봐. 그리고 이건 멸치 볶음이고, 김치도 새 걸로 담아 왔지. 고추 이건 하나도 안 매우니까 고추장 찍어 먹고, 김은 있댔지? 엄마는 쇼미 더 머니에 나오는 래퍼처럼 바쁘게 말씀하신다. 그러는 동안 아부지는 뭐 고장 난 곳이 없나 집 안을 휘휘 둘러보신다. 요 며칠 신경 써서 청소를 해 두었는데 다행이다.

 

오늘이 중복인 걸 잊고 있었다.


셋이서 고기를 굽고 밥을 먹고 얼마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두 분은 차 막힌다며 금세 내려가셨다. 아무리 오래 계셔도 세 시간 컷이다. 좀 더 계시다 가시지요. 너 글 써야지. 아니, 안 쓰는데. 너 뭐 교정한다며. 아, 그건 그렇죠. 우리도 바빠. 뭐 하시는데요? 시골은 늘 할 일이 있어. 그래 놓구선 집에 전화를 걸어 보면 두 분이 평상에 앉아 강아지 구경을 하시거나 비 오는 풍경 감상 중이시란다.


얘, 금요일이라 그런지 차가 엄청 막혔어.

에구야! 괜히 오셔 가지고.

아아니 괜히 가긴!

그래도...

너 그거 아까 남은 거 꼭 다 먹어라.

N ㅔ.

밥 남은 것도 잊지 말고.

N    ㅔ.

반찬들도 버리기 전에 잘 챙겨 먹고.

              ㅔ.


-

여름이 지나간다.


내 눈앞의 창 너머 빗물을 타고, 수화기 너머 엄마의 목소리를 타고, 두 분이 가득 채워 주고 가신 냉장고 안 불빛을 타고. 그렇게 타고 또 타고.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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