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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n 29. 2023

환대의 기억

서로의 존재를 기뻐한다는 것

그 연락을 받은 것은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이었다.


- 선생님, 잘 지내시죠? 그동안 연락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다름이 아니라 작년 2학년 A반 수연이가 편지를 가지고 왔는데요. 올해 선생님이 학교에 안 계신다는 얘기를 듣고 너무 슬퍼하면서...


작년에 함께 일했던 동교과 이 선생님의 메시지였다. 계약이 끝나고 아쉽게 교문을 나선 게 올 2월. 학교도 나도 더 일할 수 있기를 기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아쉬움도 잠시, 나는 나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바쁘게 시간을 지나며 문득문득 떠오르는 존재로 살고 있었다. 그러다 받은 메시지에서 이 선생님은 수연이의 아쉬움을 가득 전해 주셨다.


- ... 너무 슬퍼하면서 선생님 연락처를 꼭 알고 싶다고 하는데 알려 줘도 괜찮을까요?


세상에! 수연이라면 물론 기억하고 있다. 수업 시간 내내 단 한 번도 졸지 않고 수업에 집중하던 아이, 표현이 많지는 않으나 언제나 나와 칠판을, 칠판 위의 내 글씨(...얘들아 미안했다)를 뚫어지게 보던 아이 그래서 곧잘 눈이 마주치던 아이. 하지만 나는 아이들과 접점이 많은 교사는 아니었다. 중간에 투입된 기간제 교사라 담임 교사도, 보직 교사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맡은 업무도 아이들과 자주 만나는 일은 아니라 어쩌면 교과 수업 시간이 다였을 텐데, 왜 나에게 편지를?


- 어머나! 그랬군요! 네네! 물론입니다!!!!


그러자 얼마 안 있다가 바로 문자가 왔다. 수연이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 작년에 문학 수업 들었던 수연이에요. 스승의 날 축하드려요. 이렇게 시작하는 메시지에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과 어떻게 하면 편지를 전할 수 있는지 묻는 예의 바르고 정성 어린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 선생님, 저 선생님 계신 학교로 편지 보내드릴 수도 있고, 사진으로 찍어서 보내드리거나 낭독도 해 드릴 수 있어요. ㅠㅠ


낭독. 울컥한 부분이다. 내가 기억하는 수연이는 조금은 수줍게 보이는 친구. 어쩌다 말을 걸어도 조용히 웃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하고 마는 조용하고 사려 깊은 친구. 그런데 낭독이라니! 나는 얼른 '우선 사진으로 내용을 받고, 이 선생님께 편지를 맡겨 주면 꼭 찾으러 가겠다'는 요지의 답장을 보냈다. 아이는 반듯하게 찍은 편지 사진을 보내왔다. 고3인데. 고3이 한창 바쁘고 힘들 시기에 지나간 사람을 기억하고 이렇게 마음을 보내 주다니. 각 잡고 앉아서 편지를 정독했다. 아이는, 내가 작년에 지나가듯 한 말이 괴롭고 힘들었던 순간을 지나게 해 주었다고 했다. 아주 작은 말이었다. 수업 시간에 한 번도 졸지 않고 집중하는 수연이~ 이게 다였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더라?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난다.


작년에 학교 도서관에서 그런 이벤트를 했다. <선생님이 추천하는 책 이벤트>. 나뿐만 아니라 여러 선생님들이 다 같이 참여해 추천 도서를 한 권씩 선정하고, 도서관에 방문하는 학생들은 추천 책 목록을 본 후 받고 싶은 책을 그 이유와 함께 쪽지에 써서 제출한다. 1인 최대 3장까지였나? 그러면 선생님들이 쪽지를 모두 읽고, 3명을 선정해 직접 해당 학생에게 책을 전달한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책을 한 권 추천했고(정여울 작가님의 책이었다), 내가 추천한 책을 받고 싶다는 아이들의 쪽지가 담긴 통을 전달받았다. 아이들의 진심이 빼곡하게 담긴 쪽지를 전부 펼쳐서 읽고 심사숙고 끝에 3명을 뽑아 책을 전달했다. 그 중에 수연이도 있었다. 꼭 한번 책을 선물해 주고 싶던 수연이. 책을 추천받고 싶은 이유도 자분자분 잘 썼다. 마침 내가 추천한 책을 좋아할 것 같았다. 교무실에 책을 받으러 온 수연이에게 책을 주며 그랬던 것 같다. 선생님이 늘 보고 있어. 수업 시간에 늘 집중하고 한 번도 졸지 않고, 진짜 최고야. 책 앞에도 그런 말을 써 주었던가.


그 짧은 순간의 기억으로 편지를 써 왔다. 나는 자리에 누워 수연이가 보낸 편지를 여러 번 읽으며 내가 하는 말들의 무게를 실감했다. 잘 살아야지. 다시 한번, 잘 살아 봐야지. 살다가 상처 받아도, 상처에 지지 말고 끝까지 살아야지.


그렇게 5월을 보내고 엊그제 이 선생님께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다. 수연이 편지를 보관해 주신 지 한 달이 넘은 시점이었다. 지금쯤이면 학기말 시험 출제도 끝나고 조금 여유가 있으실까? 메시지를 드리자 반갑게 답장이 왔다.


- 선생님, 저희 오늘 교과 협의회인데 시간 괜찮으시면 같이 식사해요.


순간, 잠시 망설였지만(그만 둔 기간제 교사 주제에 너무 나대는 것인가 싶...) 이 선생님은 물론, 작년 한 해 파트너로 일하며 오래오래 만나기로 약속한 김 선생님도 계시고 만날 때마다 은사님처럼 살펴 주신 하 선생님도 뵐 수 있다는 생각에 달려가기로 했다. 달려가며 생각했다. 염치 어딨냐. 몰라, 그런 거. 좋은 사람들 만나는 일에는 염치 같은 거 잠깐 좀 빼고 살자.


중식당에 가서 맛난 식사를 대접 받았다. 후식으로 커피까지 마시고 2학기 일정을 논하시는데 귀동냥을 하며 앉아 있다가(염치에 이어 눈치까지 실종) 돌아왔다. 품에는 수연이 편지를 곱게 안고. 답장으로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에 빼곡하게 적은 마음을 끼워 이 선생님께 맡기고 왔다. 돌아오며, 염치와 눈치를 내려놓은 하루였지만 그러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대의 자리에 가기를 더 이상 망설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 기꺼이 다가가 함께 어울리며 그 자리를 기쁘고 행복하게 즐기는 것도 배려이고 사랑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수연이도, 그 수줍은 아이가 내게 노크해 올 때에는 많은 망설임과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기꺼이 환대하며 반갑게 맞으리라는 믿음 또한 있었을 것. 그런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서로의 존재를 기뻐하는 사람.


종일 비가 올 성싶다. 이따 형신과 비를 구경하기 좋은 카페에 가기로 했다. 진작부터 약속해 놓고 형신은 내내 내 걱정이다. 너 피곤할까 봐, 너 귀찮지 않아? 그러면서 나는 좋지 한다. 사실 나도 좋다. 환대의 자리에 기꺼이 가려는 마음으로 산다면, 언제나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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