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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Jul 27. 2023

"답게" 살라는 말

첫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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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첫 회사의 상사이자 동료였던 분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2012년에 입사하고 3년 만에 뛰어나온 나를, 지금껏 이해해주시고 살펴 주시는 분들이다. 정직원으로 일한 기간은 3년이었지만 퇴사 후에도 프리랜서 강사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나는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2023년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는 함께하고 있다. 그렇게 서로 오래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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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겨울, 취업을 준비하던 시기가 생각난다. 그때 나는 2년 가까이 백수로 지내며 자신감이 많이 추락해 있는 상태였다. 뭐든 되겠지! 하면서도 뭐도 안 되면 어떡하나 아니, 정말 뭐가 되어 버리면 어쩌지 하는- 생각만 많던 시기이다.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처음부터 취업은 생각도 않고 학자가 되겠다며 공부하는 길로 뛰어들었더랬다. 내가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착각하며 오독과 오해와 오판의 끝을 달렸던 스물셋. 그렇게 5년이 지나서야 나는 석사학위 하나 달랑 손에 쥔 채로 취업 시장에 나왔고, 시민단체에서 일한 1년의 경력과 학회 간사 경력, 연구 보조원 경력, 두어 개의 논문 및 몇 가지 문학상을 이력서에 적으며 절망했다. 


아무리 봐도 회사에서는 잘 봐 줄 리가 없는 이력 같아서였다. 


당시 4년 차 직장인이었던 오빠에게 이력서를 주고 좀 읽어 봐 달라고 했다. 공대생인 오빠는 내 이력을 보더니 흠... 하고 말을 아꼈다. 왜? 어떤 것 같은데? 한참 만에야 나온 답변은 아리송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내 이력처럼 말이다. 


뭔가... 서로 연관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 같은 이력이야. 


이런 걸 거미줄 이력이라고 하는 걸까. 언뜻 보면 있는지 없는지, 이어졌는지 끊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자세히 보면, 보고 또 보면, 햇빛에 비추어 보면 어느 순간 의외로 보일지도 모른다. 섬세하게 이어져 있는 나의 이력이, 내 발자국들이. 혹시 아는가.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어느 순간 이어져 별 모양이 되어 있을 수도 있잖아! 하하!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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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대로 서른이 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나는 정성을 다해 서류를 준비하고 이곳저곳에 원서를 내기 시작했다. 어차피 새롭게 시작하는 거 이왕이면 원하는 곳에 다 넣어보라는 오빠의 말을 듣고 정말 '원하는 곳'에 다 넣기 시작했다. 그러니 잘 될 리가 있나. 심지어는 한 방송사의 PD 채용 공고에도 지원했다. 시사다큐 PD를 꿈꾸며 잠시 그 길을 알아보았던 기억이 나서였는데, 그 해에는 마침 '예능 PD'만 모집하고 있었다. 예능은... 잘 안 보지만 한번 써 볼까. 그렇게 나는 자소서를 "다큐"처럼 진지하게 써서 "예능" PD에 지원했고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가 아니라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러다가 내게 첫 회사가 되어 준 A사를 만났다. 교육 기업인 이곳은 입시를 준비하던 사촌동생을 도와주며 처음 들었다. 내가 학생일 때도 있었지만 그때는 이름이 달라서 미처 모르고 있었는데 입사하고 신입사원 교육 때 기업의 역사를 들으며 깜짝 놀랐다. 생각보다 꽤 오래된 기업이었기 때문이다. A사에 원서를 낼 때 나는 좀 지쳐 있었다. 남들은 대학 졸업 무렵에 다 겪고 지나간 일을 홀로 새롭게 마주하고 있으려니 순간순간 겁이 나고 두려웠다. 아무도 나를 뽑아주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이대로 스물아홉을 지나 서른이 되면 어쩌나 하는 막막함. 그때 A사 공고를 보았다.


청소년교육연구소 연구원 모집. 진로진학 탐색 프로그램 설계 및 제작. 자기주도학습 프로그램 기획 및 운영. 


뭔가 굉장히 신선하고 재미있어 보였다. 시민단체에서 근무하며 청소년 멘토링 프로그램 같은 건 여러 번 기획하고 운영해 봤는데 비슷하려나. 연구원이면 내가 해 온 일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고, 집에서 다니기에도 좋은 곳에 있다. 지원을 준비하며 잘 되면 좋겠다는 마음이 계속 커졌다. 그런데 그러면 떨어졌을 때 실망이 클 것 같아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떨어져도 또 기회가 있겠지. 평생 집에서 놀지는 않을 거야. 뭐라도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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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님, 그래서 제가 이건 드린 적 없는 말씀인데요.  


나는 잔에 조금 남아 있던 맥주를 원샷한 뒤 말을 이었다. 


팀장님이 서류 합격 전화 주셨을 때 한낮이었어요. 집에서 맨밥에 물을 말아 멸치랑 깨작깨작 먹고 있었거든요? 02번으로 번호가 뜨고 아무 생각 없이 받았는데 팀장님께서 너무나도 상냥한 목소리로 "여기 A사인데요. 엄태주 씨 되시죠?"라고 하셔서 깜짝 놀라 일어나다가 그만 미끄러져 우당탕탕 넘어졌어요. 


팀장님을 비롯해 자리에 있던 이사님, 김 선생님이 모두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셨다. 그 와중에도 전화기를 꼭 붙들고 놓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네네, 면접 갈 수 있습니다. 네네, 다음 주요. 오후 세 시. 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를 세 번 정도 더 말했던 것도 같다. 의연하고 멋있게 한 번만 딱 말하고 시크하게 전화를 끊었어야 하는데 그때의 나에게는 그 전화가 빛과도 같아서 고개를 조아리다 못해 땅 끝까지 숙이고 인사를 했다. 보이지 않는데도. 혹시라도 떨어지면 실망할까 봐 가족들한테는 말하지 않았다. 면접 하루 전날 옷을 좀 사러 가고 싶다고 하니 엄마께서 서울로 올라오셨다. 그래, 옷도 좀 사고 그래야 면접 때도 입고 하지. 그날 나는 무얼 샀느냐 하면 붉은 머플러를 샀다. (네????) 그날 아침에 본 이번 주의 운세 뭐 그런 것에서 빨간색이 들어간 아이템을 착용하면 운이 좋다는 말을 읽고서였다. 네??? 그런 걸 믿는다구요??? 


믿고 싶었다. 아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런 때가 있지 않은가. 뭐라도 믿고 싶은 마음. 


그리고 나는 정말로 그 머플러를 하고 면접을 보러 갔다. (그것도 그냥 붉은색이 아니라 장미꽃처럼 검은색 무늬가 있어 얼핏 봐도, 자세히 봐도 참 강렬하기 그지없는...)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가 없는데 아직 20대였으니 "용자(勇者)"였던 것으로 하자. 엄용자. (이런 것에 용기를 내지 말라고!) 또 하나.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귀걸이를 한쪽만 하고 갔다. 미쳤다. 아, 이건 좀 설명이 필요한데 정확히 말하면 까먹고 안 하고 갔다. 당시 나는 귀를 네 군데 뚫었고 왼쪽에 두 개의 구멍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만 작은 귀걸이를 한 채 갔다고 할까. (TMI) 그럼 그걸 뺄 것이지 그런 생각도 못하고 가서 면접을 봤고 그렇게 실무 면접을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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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스모키한 눈 화장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 


이사님의 말씀에 팀장님이 빵 터지셨다. 나는 아아앍!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술잔을 부여잡았다. 쥐구멍에 숨고 싶은 기억이다. 당시 나는 "화장알못"이라 정말 화장을 (드럽게) 못했는데, 그때 친구에게 아이라인 그리는 법을 막 배운 참이라 배운 대로 하고 갔다. 물론 친구는 그렇게 가르쳐 준 적이 없다. 이걸 이렇게 샥 그리면 눈매가 깊어 보여. 태주 너도 이렇게 하고 다녀 봐. 그래? 나는 눈이 작으니까 꼭 하고 다녀야겠다. 친구가 하던 대로 샥 그렸는데 "샥"이 아니라 "샤크"였는지 웬 상어 한 마리 같은 눈이 되어서 면접을 보러 갔다는 후문. 생각해 보라. 


빨간 장미꽃 머플러를 두른, 상어 아이라인 스모키 눈의, 귀걸이는 한쪽만 한, 커트머리 여자. 


이사님은 얜 뭐지? 하는 생각을 하며 면접을 보셨다고. 그럼에도 내가 엄 연구원을 뽑은 건... 이사님은 술잔을 기울이셨다. 엄 연구원이 궁금하기도 했고 또 내가 그런 게 있었거든.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애틋함. 그런 게 있었어. 나는 괜히 바쁘게 안주를 집어먹었다. 물에 만 찬밥을 멸치와 함께 먹으며 오늘은 또 뭘 하나 고민하던 한낮도 떠올랐다. 그렇게 나는 최종 면접까지 갔고 2012년 봄, 신입 연구원이 되어 우당탕탕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엄마는 딸내미가 드디어 백수를 탈출해 한 기업의 정규 사원이 된 것이 얼마나 기쁘셨는지 하루는 회사 근처까지 나오셨다.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점심을 사 드렸고, 회사 내부도 구경시켜 드렸다. 엄마의 눈이 반짝이던 기억이 난다. 엄마는 내가 건넨 명함을 지갑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소중히 넣으셨다. 오빠의 명함을 덮어 버려 내가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누가 봐도 오빠의 회사는 더 크고, 더 유명한 곳이었는데.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로 명절 선물을 보냈던 때에는 아빠의 입이 귀에 걸리셨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밥벌이"라는 말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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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게" 살아요. 


무슨 얘기 끝에 이사님이 문득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예?

엄 연구원 "답게".


물을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끄덕였다. 답게 산다. 지켜나갈 수 있을까. "밥벌이" 만큼이나 무거운 말이다. 먹고사는 일과 답게 사는 일을 조화롭게 잘 지키며 살고 싶다. 생계를 이어나가는 일은 아득하고, 남은 날들은 더욱 아스라하여 순간순간 용기가 사라질 때가 있다.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살아질 것이다. 그러니 너무 움츠러들지 말고 의연하게 오늘의 이 하루를 또 살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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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오래되고 있는 사람들.

그 속에 섞여 나도 아주 오래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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