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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Sep 24. 2023

아주 청명한 바람이 불었다

여름 동안의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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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바람이 차가워졌다.

여름 내내 열어 두었던 창을 닫을 때가 왔다. 해마다 가을이면 조금 덜 슬프고 더 기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잘 되지 않겠지만 노력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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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지나는 동안 두 번의 북토크가 있었고, 월간지에 글을 한 편 기고했고, 소설 두 편을 썼다. 그중 하나는 장편이었는데 원고지 500매까지가 무척 힘들었다. 쓸 수 있다고 끝까지 쓰라고 말해 준, 곁의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아마 포기했을 것이다. 그렇게 '쓰거나 버리거나' 폴더의 파본만 하나 더 늘었을 것. 마의 500매를 넘어 790매까지 갔다가 수정하면서 740매로 결말을 지었다. 그렇게 가을이 왔고, 지나간 여름은 내게 무척이나 치열하고 충만한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열대야를 겪듯 잠 못 이룬 밤들이 길었지만 여름은 원래 그런 계절이다. 뜨겁고 치열하고 그래서 괴롭지만 그 괴로움마저 나는 좀 사랑하는 것 같다. 지구에 종말이 온다면 왠지 그 계절은 여름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난 기억들을, 시간순대로 몇 자 적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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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초에 샘터사의 연락을 받고 9월호에 글을 한 편 싣게 되었다. 오래전 다른 월간지와 계간지 등에 글을 실은 적이 있지만 그건 청탁은 아니었다. 응모작이나 수상작으로 실린 것이었기에 이번 원고와는 결이 좀 달랐다. 적어도 내게는.


처음이라 집필 초반에는 애를 좀 먹었지만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그 과정에서 기자님과 소통하면서 많이 배웠다. 워낙 길게 쓰는 습관이 들어 있다 보니 짧게 줄이는 게 특히 힘들었는데, 많은 훈련이 되었다. 의식적으로 좀 짧게 쓰는 노력을 해 봐야겠다, 라고 다짐했으나- 장편소설 쓰면서 또 무너진 듯하다. 이제 일단락되었으니 매일을 기록하며 다시 연습해야겠다.


모든 새로운 경험은 필연적으로, 실수와 자잘한 실패를 품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실수와 실패들 덕분에 하나의 시도를 '새로운 경험'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프고 쓰라려도 좋으니 앞으로도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통해 날마다 새로워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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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말에 홍대 <땡스북스>에서 북토크를 진행했다. 땡스북스를 가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무척이나 환하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뻘쭘하게 들어섰는데 사장님께서 다정하게 맞아 주셔서 긴장이 많이 풀렸다. 어느 정도로 일찍 갔느냐면, 도착했을 때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고 내가 1번이었다. 오늘 북토크 신청하셨나요? 성함이... 앗, 저 제가 그... 예, 엄태주... 아앗! 사장님도 놀라시고 나도 놀랐다는 후문. 이 모든 게 그놈의 조급증 때문이다.  


화요일 저녁이었고 비가 꽤 많이 오는 날이었다. 전 직장인으로서 화요일 저녁이 갖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세상에, 화요일 저녁이라니! 아직 까마득히 남은 평일들, 여전히 잔존하는 월요병의 흔적들. 당장 내일을 위해 쉬어야만 하는 이유가 백 개도 넘는다. 그런 날에 일을 마치자마자 빗속을 뚫고 먼 길을 달려오는 마음들에 대하여- 그리고 그날 저녁 마주한 스무 명의 눈빛에 대하여- 엣눈북스 대표님께서 먼 훗날 이날을 떠올리면 마음이 참 애틋할 것 같다고 하셨는데, 깊이 공감했다. 애틋하다 못해 마음이 아주 뜨거워져 버릴 것만 같다. 오래오래 쓰고 지우며 우리 같이 할머니가 되자고, 그런 다짐을 했다.


그날, 죽는 날까지 써도 결국 다 쓰지 못하고 갈 이야기를 선물받았다. 그래서 그 선물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씩 풀어내는 마음으로 그렇게 오래오래, 능력이 닿는 한 끝까지 써 볼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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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올해도 청주대학교에서 특강을 진행했다. 지난봄에 <ㅂ들> 책을 중심으로 문학과 삶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이번 가을에는 독서 토론 수업을 맡아서 학생들과 '홀로코스트' 및 '인간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이라는 대주제를 받고 꽤 고심했다. 두 권의 책을 정해 4시간 동안의 수업을 준비해야 했는데, 결론적으로 무척이나 의미 있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 되었다. 2017년에 다녀온 아우슈비츠와 작센하우젠, 베르겐-벨젠의 수용소 사진들을 공유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무척 뜻깊었다. 진지하고 선명한 눈빛을 가진 이십 대 청년들과 이런 시간을 함께할 수 있음에 무엇보다 감사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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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번 주 금요일에 대구 <치우친 취향>에서 북토크를 진행하고 왔다. 4회에 걸쳐 진행되는 '심야책방' 프로그램의 한 꼭지를 맡게 된 까닭이다. 이번 책 <배움의 배신> 북토크 전에는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감독님이 오셨고, 뒤에는 요조 작가님도 오신다고 하여 이 라인업에 내가 끼어도 되는 것인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사장님, 독자님들께서 너무나 기다렸다고 반갑게 맞아 주셔서 긴장이 풀리고 마음이 무척 따뜻해졌다.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감동적인 시간이었다.


하늘이 아름다운 날이었고, 오랜만에 만난 대구는 미래 도시처럼 반짝였다. 여담이지만 나는 대구 디지스트 안에 본사를 둔 스타트업에서 1년 반을 일했다. 그 덕분에 꽤 자주 대구에 갔었다. 그러나 여행이 아닌 출장이었기에 대구의 면면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이번에는 여행 가는 기분으로 나서서 그런지 아주 설렜다.


<치우친 취향>은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책방 사장님 고유의 취향이 물씬 풍기는 참 아늑하고 따뜻한 곳이었다. 내가 쓴 <세상의 모든 ㅂ들을 위하여>를 무려 네 번 이상 정독하셨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엇, 저보다 많이 읽으셨는데요? 하고 놀라니 독자님들과 사장님 모두 빵 터지셨다. 아무도 안 오시면 어쩌지, 그러면 사장님과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고 가야겠다 마음먹었는데 공간을 꽉 채울 만큼 많은 분들이 와 주셔서 진심으로 놀랐다. 아,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닳고 닳아서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감사하다'는 말. 이 외에 더 좋은 말이 있다면 그 말을 했을 텐데. 세 번째 책을 기다린다는 말씀들에 아주 큰 힘을 얻고 왔다.


기회가 된다면, 나중에 다시 <치우친 취향>을 방문하여 와인 한 잔과 함께 오래도록 책을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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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의 이야기.

대구 중앙로역의 '기억 공간'을 다녀왔다. 올해는 대구 지하철 참사 20주기이다. 2003년 2월, 그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대학 새내기 MT에서 아침을 맞은 참이었고, 몇몇 선배들과 동기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TV 앞에 심각한 얼굴로 모여 있었다. 대구 출신 사람들을 불러 집에 전화해 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


남은 자의 몫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기억이라는 것은 공들여 붙들고 새롭게 다짐하지 않으면 곧잘 휘발해 버린다. 그러지 않기 위해 '새기는 마음으로' 그날들을 기억할 일이다. 물론 아프고 괴롭다. 그러나 그럼에도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다. 기억 공간을 걸으며 잊지 않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해 보았다. 기억해야 할 일들이 자꾸만 느는 것은, 앞선 날들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까닭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무엇을 배워야 하는 걸까.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손 놓은 채, 엉뚱한 일들에 골몰해 있는 사이 참 많은 것들이 잊혀지고 사라져 간다. 무거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니 아주 청명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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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가을이 내게 주는 슬픔에 지지 않고, 좋은 것을 많이 보고 경험하고 느끼며 글로 남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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