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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Sep 25. 2023

내향인의 외출

1 외출 5 클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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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밖으로 나가는 일은 모두 외출이다.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하다 못해 집 앞 슈퍼에 가서 우유를 하나 사 오는 일도 전부 외출이자 일정의 범주에 넣는다. 고로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란, 완벽하게 집과 혼연일체가 되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을 수 있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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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바로 그 '아무 일정'도 없는 날이었다. 너무도 만족스럽게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보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에 대한 고찰은 시시때때로 나를 괴롭히지만- 그렇다고 다르게 살았을 때 더 큰 만족이 오지도 않았기에, 일단은 내가 선택하고 스스로 만든 '오늘 하루'에 만족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같은 인식에 다다르는 데만도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렵게 얻어 낸 오늘 하루를 귀한 보물을 보듯 본다. 그러고 보면, 보물이란 금고처럼 깊숙한 어둠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무엇이 아니라 흔하게 널리고 널린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일 수도. 흔하면 그게 무슨 보물이냐 하겠지만, 아끼고 사랑하면 그게 다 보물이지 싶다. 아주 추상적이어서 아차! 하는 순간에 놓치기 쉬운 것들. 우리는 이들에 주로 '사랑', '우정', '평화'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이름조차 너무나 추상적이고- 애틋하다.  


이런 (언젠가는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쓸모없음이 자명해 보이는) 생각을 하며 어제 하루를 보내고, 오늘은 큰 마음먹고 외출을 감행했다. 단 한 번의 외출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하기에 외출 직전이 가장 바쁘다.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인 동선으로 의미 있게 움직일 수 있을까 끊임없이 머리를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계획을 이름하야 '나간 김에'라고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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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오늘의 '나간 김에' 계획 목록이다.


1) 재활용 분리수거를 한다.

2) 옷 수선집에 들러 바지 지퍼 수선을 맡긴다.

3)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친다.

4) 헬스장에 들러 운동 기한을 연장한다.

5) 운동을 한다.


4번에 있는 헬스장 기한 연장에 대해서는 어제 내내 고민했다. 사실 뻥이다. '내내'까지는 아니고 잠깐씩 두어 번 고민했다. 고민의 이유는 뻔하다. 운동하러 가기가 (너무너무) 싫기 때문이다. (이 당당한 모습 보소) 그리고 왠지 지금처럼 가뭄에 콩 나듯 운동을 해서는 안 가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하는 합리화 과정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일단 헬스장이라도 등록해 두고 가뭄에 콩 나듯이라도 가는 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 이천 배 정도 낫다는 것을 진작에 체감했다. 하여, '어쩔 수 없이' 헬스장 등록을 연장하기로 했다. 게다가 이 같은 생각에 힘을 보태는 일이 최근 발생했는데, 그건 2번 '옷 수선'과도 관련이 있다.


엊그제 청바지를 입다가 너무 힘차게 지퍼를 올리는 바람에 투둑! 하고 지퍼를 아예 뜯어 버렸다. (예?) 참고로 바지가 작아진 건 아니다. 절대 그런 건 아니다... 그냥, 힘이 셌을 뿐... 아니, 어떻게 해야 지퍼를 통째로 뜯어 버릴 수가 있죠? 나는 황망하게 바지를 들여다보다가 하하하! 웃고는 이런 결론을 내려 버렸다.


- 역시! 팔 운동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어! 헬스장에 연장 신청을 해야겠군. (예...?)


뭐, 그렇게 됐다. 나는 재활용 봉지와 소포물, 뜯어진 바지를 몽땅 싸 들고 거리로 나섰다. 일단 나가면 기분이 좋기는 하다. 집에 있는 게 오만 이천 배 정도 좋지만, 막상 나오면 그 나름대로 또 맛과 멋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청명한 날씨에는 산책도 자주 해 줘야 한다, 라고 머릿속으로만 되뇐다. 계획 따위는 잘 세우지도, 지키지도 못하지만 아무튼 '1 외출 5 클리어'를 해야 하므로 야무진 발걸음으로 힘차게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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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을 클리어하고 옷 수선집으로 향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약간의 위기에 봉착했으나 무사히 바지 전달. 내일 바로 찾으러 가야 하기 때문에 얼결에 일정이 생겼다. 내일도 1 외출 예약. 그렇다면 나가는 김에 치과에 들르고, 책 빌리러 도서관에도 가야겠다. 중얼거리며 우체국으로 향했다. Ddong-hands답게 테이프를 모양 빠지게 붙이고 우당탕탕 발송도 완료. 여섯 살 때의 만들기 시간 속 내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재에 크게 실망한 순간도 잠시, 외출의 끝이 보이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헬스장에 들러 연장을 신청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좀 수줍지만, 용기를 내 말했다. 그런데 음악 소리 때문인지 내 마스크 때문인지 트레이너 선생님이 자꾸 내 이름을 틀리게 말해 연장하는 데 좀 차질이 있었다.


- 회원님, 성함이요?

- 엄태주입니다.

- 언태주요.

- 네. (언? 내가 잘못 들었겠지.)

- 음... (타닥타닥) 회원님, 죄송하지만 성함 다시 한번...

- 엄태주요.

- 언?

- 예? (언 씨가 있나요?) 아뇨. 엄...

- 언!


마스크를 벗었다. 엄이요! 엄! 그런데 트레이너 선생님의 표정이 여전히 아리송하다. 나는 엄 씨 성을 가진 연예인들 중 누구를 말해야 한번에 알아들을까 잠시 고민했다. 엄정화의 엄, 이라고 할까? 엄기준의 엄? 그러는 사이 트레이너 선생님이 아! 엄! 아이고, 죄송합니다! 했다. 다행이었다. 안 그러면 엄마의 엄, 엄청나다의 엄이요 할 뻔했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엄마의 엄'이라고 하자.


그렇게 연장 등록을 무사히 마치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운동까지 완료했다. 하기 전에는 너무 귀찮고 싫지만 하루를 행복하게 마무리하는 데 운동만 한 것이 없다. (지난주에 겨우 한 번 간 주제에 말은 하여튼...) 물론, 어제는 운동을 안 해도 행복했지만- 그래도 해야지. 가뭄에 콩 나듯이라도 해야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서점에 들러 책을 '또' 샀다. (제발 그만 사!) 그러니까, 사실은 1 외출 5 클리어가 아니라 1 외출 6 클리어인 셈이다. 어느 쪽이든 오늘 나는 운동을 했고, 책을 샀고, 청소도 했다. 이렇게 소소하지만 분명하게 쌓아가는 하루들이, 어느 순간 닥쳐 올 희미하고 불분명한 불안을 해소하는 데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마치 게임에서 하트 모양 '생명'을 하나씩 따서 저장해 두듯이.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을 마주할 때마다 열심히 산 하루를 꺼내어 방패로 쓴다고 생각하자. 불안은 늘 나보다 크고 강하고 종잡을 수 없이 날뛰지만, 켜켜이 쌓아 온 내 하루들도 못지않게 크고 강하다. 종잡을 수 없이 날뛰는 것들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리된 시간들 앞에서 무력하게 쓰러질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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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하며 음악을 들었다. 그 후에는 저녁으로 볶음밥을 먹고 몇 줄의 글을 쓰고 책을 읽었다. 더할 나위 없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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