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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주 Oct 05. 2023

아주 먼 곳으로부터의 전화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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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부모님이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나셨다. 7박 9일 동안 스페인의 몇 도시와 포르투갈을 묶어 둘러보는 패키지 여행이다. 우리 집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아니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엄마야 워낙 활달하시고 여행을 좋아하셔서 그런가 보다 했지만 문제는 아빠. 


아빠는 여행을 '극도로' 싫어하신다. 아빠께 유일무이한 최고의 공간은 오직 '집'이며, 여기에는 오빠네 집이나 내가 기거하고 있는 우리 집은 포함되지 않는다. 시골로 내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신 이래로 시골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머무르신 시간을 다 합해야 보름도 안 될 것이다. 농담 아니고 진짜다. 내 기억으로 오빠네 집에서 주무신 적은 딱 한 번이며(결혼 생활 10년 동안), 우리 집에서는 그나마도 없다(독립생활 14년 동안). 어쩌다 다니러 오셔도 늘 세 시간 컷이니 말 다 했다. 엄마는 엄마대로 좀 느긋하게 아기들도 보고 하룻밤 주무시면 얼마나 좋으냐며 투덜대곤 하셨다. 하여간 늬 아빠 독특한 건 알아줘야 해. 그럴 때마다 나는 젊은 시절 출가를 꿈꾸었다는 아빠를 가만히 떠올려 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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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런 아빠께 '스페인 여행'이란 그러니까, 당신의 사전에는 절대 들어갈 리가 없는 개념인 셈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건 내 짐작이지만, 아마도 아빠의 '칠십춘기'와 조금 관련될 것 같다. 아빠는 올해 일흔둘이 되셨다. 지금은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오셨지만 칠십이 된 그해에 아버지는 적잖이 우울해하셨다. 이제는 정말 노인이구나 하는 마음이 크셨나 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할아버지 소리를 들었지만, 그것과 실제로 자신의 나이를 체감하는 것은 크게 다를 것이다. 아빠는 체력도, 지력도 예전 같지 않다며 부쩍 의기소침해지셨고, 엄마까지 덩달아 우울해하셔서 오죽하면 내가 한 달 정도 시골에 내려가 있었다. 그때 백수였기 때문이다. 지금 보니 내가 백수인 꼴을 보는 게 더 우울하셨을 수도. 눈치 꽝인 딸.


그러다가 70대를 받아들이고 회복하셨는데, 그때부터 약간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나 보다. 시골 작목반에서 주최하는 국내 여행에 잠깐씩 다녀오시더니 지난여름인가에는 갑자기 스페인을 가겠다고 선언하셨다. 정확히 말하면, 스페인 여행을 갔다 오면 어떻겠느냐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볼까' 하셨다고. 하여, 이렇게 저렇게 준비를 하시더니 결국 9월 중순 휘리릭 떠나셨다. 떠나기 전까지 연락이 닿을 때마다 내 잔소리(?)를 들으셨음은 물론이다. (나는 철저한 노플랜 여행주의자인 주제에 괜한 짓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산책을 열심히 하시고 스페인 관련 책도 빌려 달라고 주문하시며 설레하셨다. 주변에 스페인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언니뿐이었기 때문에 언니는 십수 년 전 기억을 되살려 '어머니, 이건 보셔야 하구요. 이때는 쉬시는 게 나아요' 하며 거들었다. 그렇게 우당탕탕 두 분이 떠나시고 난 빈자리가 왜 그런지, 아주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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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였던 오빠의 메시지가 가족 단톡방에 뿅 하고 뜬 건 두 분의 출국날 오후였다. 


지금 카자흐스탄을 지나고 계시네요.


엥, 이게 무슨 소리야? 들여다보니 웬 비행기 한 대가 어딘가를 지나고 있는 사진이다. 비행기 경로를 추적하는 앱에서 캡처한 이미지. 별 걸 다 찾아봤구만! 하면서도 나는 슬쩍 이미지를 다운받아 저장했다.  그러고서는 내내 궁금해했다. 지금쯤 어디실까. 기내식은 잘 드셨나. 잠깐씩 일어서서 운동도 하시겠지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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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부모들은 자식들이 집 밖을 떠나 있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보내는 걸까. 매 순간 궁금하고 걱정하고 안달하면 병이 나서 못 살겠지. 그렇지만 가끔가끔 생각이 나겠다. 얜 지금 뭐 하나, 밥은 먹었나, 오늘은 언제나 돌아오려나. 소풍이라도 떠나보내고 여행이라도 멀리 가면 더하겠지. 나는 자리에 누워 뒹굴거리다가도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흘렀다. 다음 날 새벽엔가 일찍 눈이 떠졌는데 단톡방에 엄마의 메시지가 올라와 있었다. 


우리 잘 도착해서 이제 자려고 한다. 내일 보자. 


거긴 밤 11시라고 했다. 오빠의 짧은 답장과 내 호들갑 섞인 몇 개의 메시지가 연달아 뜨고 단톡방은 잠잠해졌다. 괜히 스페인, 패키지 여행 그런 단어들을 인터넷에 검색해 보며 아침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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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를 마감할 때면 사진 몇 장이 뿅뿅 올라왔다. 화창한 날씨. 웅장한 유적들. 나도 나중에 한 번쯤 가 볼까. 스페인은 어쩐지 크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는데 두 분이 가신 곳이라니 괜히 궁금해진다. 그렇게 오후를 맞았는데,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 전화였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거 뭐야?  보이스 피싱? 서, 설마 스페인에서 온 전화야?!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의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여보... 세요?

태주니??

앗, 엄마?

응! 나야! 

아니, 어쩐 일이세요? 잘 다니고 계세요?


엄마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밝았다. 앗, 괜히 깜짝 놀랐네. 그러면서도 나는 국제전화라 비쌀까 봐 전전긍긍이었다. 아니, 엄마 로밍하셨어요? 응! 나 로밍했어. 3만 얼마 줬더니 3기가인가 준대! 아, 그래요? 거긴 아침인 모양이었다. 옆에서 아빠의 마른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건강하시죠? 좀 피곤하긴 한데 엄청 좋아, 여기. 와, 다행이다! 엄마는 내 북토크 응원차 전화를 하셨다고 했다. 너 내일인가 모레에 북토크하러 대구 가잖아. 아아, 그래서 전화하신 거예요? 그래! 아유, 안 하셔도 되는데. 잘 갔다 오라구. 네에. 


그렇게 약 2분간의 통화를 마쳤다. 좋은 세상이다. 스페인에서 걸려 온 전화도 다 받고. 나는 읽던 책을 덮고 통화 목록에 찍힌 '엄마'라는 두 글자를 보며 괜히 중얼거려 보았다. 스페인, 스페인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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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걸어온 날, 엄마는 알함브라 궁전에 갈 거라고 하셨다. 아빠는 자꾸 겉돌면서도 열심히 따라다니신다고. 일행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 겉도는 아빠를 생각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얘, 그러니 늬 아빠가 스페인에 온 거 자체가 기적이지 뭐니. 그러게요. 엄마가 보내온 사진 속에서 유독 잘 나온 게 있었는데 그건 다 아빠가 찍은 거라고 했다. 한편, 아빠 사진은 전부 뒷모습이거나 멀리 점처럼 찍힌 것들이었는데 아무리 같이 찍자고 해도 싫다고 하시는 통에 엄마가 몰래몰래 찍은 거라고. 어쩌다 두 분이 같이 찍은 사진에서 아빠는 오백 년 된 동상처럼 심각한 얼굴로 굳어 계셨다. 그걸 보고 언니는 '아니, 아버님 기분이 안 좋은 거 아니세요??' 하며 걱정했다고. 그럼 오빠가 다시 들여다보고 '원래 그러시니 전혀 걱정할 것 없다'라며 안심시켰다나. 하여간 재미있는 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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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은 그렇게 7박 9일의 일정을 무사히 끝내고 추석 전날 귀국하셨다. 내가 마중 나가겠다고 하니 손사래를 치시는데 그래도 갈게요 했더니 못 이기는 척 그럼 그럴래? 하신다. 나는 얼른 집을 치우고 한 사나흘 안 돌아올 준비를 해 길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좀 색다른 기분을 선사한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 커다란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는 만남과 헤어짐. 


얼마나 기다렸을까. E 출입구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함께 기다리던 사람들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달려 나가고, 그렇게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이제나저제나 고개를 빼고 보는데 멀-리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번쩍 손을 들어 흔드니 나를 먼저 발견한 아빠가 커다랗게 웃으셨다. 엄마는 아이처럼 손을 흔들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아무리 들어도 자꾸 까먹는 긴 이름의 도시도, 유적도 아주 좋다고 하셨다. 엄마도 이랬겠구나 싶다. 엄마는 잘 모르고 나만 아는 어딘가를 다녀올 때마다 내가 쫑알대며 이야기를 하면, 엄마도 고개를 끄덕끄덕 열심히 들어주셨겠지. 자꾸 잊어버리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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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그러니까 열 살 무렵, 처음으로 엄마를 떠나 여행을 간 적이 있다. 학교에서 소규모로 팀을 꾸려 2박 3일 정도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는 방학 중 여행이었는데 무슨 용기에서인지 그걸 가겠다고 나섰다. 엄마는 걱정을 하면서도 또 보내주셨다. 

  

태주야, 너 서울 많이 가 봤잖아.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고모네 전화해. 알았지?


당시 고모네 가족은 고속터미널 역 근처에 살고 있어 우리는 서울을 갈 때마다 연례행사처럼 꼭 고모네 집에 들르곤 했다. 네에! 고모네 집 전화번호를 꼭꼭 접어 주머니에 넣고 당시 친하게 지냈던 친구 몇 명과 손을 잡고 버스를 탔다. 잠자리가 불편하고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었지만 한강 유람선을 타고 롯데월드에서 바이킹을 타면 또 금세 잊어버렸다. 그렇게 2박 3일을 보내고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 다 되어 있었다. 비까지 내려 더 어둡고 스산한데 버스 문이 열렸다. 문밖이 시끌시끌했다. 뚱뚱한 가방을 끌어안고 버스에서 뛰어내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활짝 웃는 엄마 얼굴. 엄마는 내 노란 우산까지 챙겨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맨 앞에 서 있었다. 키도 제일 작으면서 어떻게 우리 엄만 그 수많은 엄마들을 제치고 맨 앞에  선 걸까? 나는 괜히 좀 눈물이 나서 힝 하면서 엄마 품에 안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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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시절도 다 지났다. 산다는 건 뭘까. 


추석이 지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무심히 지나가는 가을을 본다. 언젠가 이 시간도 지나고 우리들의 시간마저 다 지나 버렸을 때, 그때에도 어떤 기억들은 성성하게 살아 여전히 흐르고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아주 먼 곳으로부터 걸려온 전화처럼, 기억도 그렇게 멀리에서부터 문득 살아와 어떤 힘든 순간들을 힘껏 지탱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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